2018.06.13(수)
2018.06.13(수) 흐림
선거일임에도 미리 사전 투표를 했기에
목욕탕을 다녀와서는 콩나물 국밥을 끊여 주는데 먹는 등 마는 둥 하고는 집을 나서서
고성에서 정남이 형님을 태우고 삼협사 인쇄소에 도착을 해서
그곳 하사장이 그동안 작업해 둔 자료를 확인하였고
족보제작 가격을 흥정하는데
깎고 할것도 없이 사전에 통화하면서 우리쪽 사정을 이야기 했는데
그걸 고려해서 가격을 책정한듯이 70권에 200만원을 요구하여
혼쾌히 승락하였습니다
동행한 형님도 더 할인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예산 집행인데
문중 돈으로 집행하자는 정남이 형님의 주장과
정기예금 시켜 둔 문중 예금은 사용할 수 없다고 하는 내 의견과 상충되었습니다
결론은 우선 문중 자금중 정기예금 이자와 내 사비로 집행하고
올 시제때 제작한 족보집을 나눠줄때 찬조를 받거나 권당 3만원씩 금액을 징수하는 방안이
최적으로 하고
문중 회의때 찬조금을 받기위한 인삿말은 정남이 형님이 해 주기로 했는데
그때가서 봐야 할 일입니다
최종 족보 정리본을 받아 오면서
인쇄소 측에서 내 인척과 정남이 형님 인척간(8촌간) 정리본을 구분해 주었는데
그 자리에서 정남이 형님 잦노심을 고려해서
모두 내가 정리해야 할 몫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지고 나 올 수 없어
일단 나눠 들고 나와서 승용차 안에서
정남이 형님에게 분배한 정리본을 내게 주고 가면 내가 알아서 정리할테니
혹여 문중 사람들 전화번호가 필요하면 그거나 알려 주라고 하고는 고성으로 승용차를 타고 오는데
진주 하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정남이 형님집과 우리집이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물었고
가까우면 정남이 형님 몫으로 가져 간 정리본을 내가 받아서 내 더러 정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사장도 대충 눈치를 챙것 같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내가 맡아서 하기로 결정된 사안이었는데 말입니다
큰집 앞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는 큰집에 들어가서
형수님을 모시고 셋이서 건너편에 있는 한정식 식당으로 가서 식사중에
내가 먼저 다음에 시간네서 남촌에 있는 선대 묘를 확인하러 가자고 하였더니
형님은 말 나온김에 식사후에 바로 가자고 하여
거류면 화당리로 갔습니다
신용리 하원마을에 사는 친구인 김판수에게 전화를 걸어 남촌이라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하원마을이 남촌이라고 하였고
나중에 화당리에 사는 65세된 김해김씨 삼현파 종친을 만났는데
그 분은 신용리와 화당리을 합쳐 앞 바다를 끼고 있기에
남촌개라고 불렀고 옛날 마을 이름이 통틀어 남촌이었다는 말을 하는데
그 분 말이 더 신뢰가 갔습니다
그리고 화당리에 있는 김해김씨 종대(제실) 뒤편 대밭에 있었다는 5대조 조부(祐圭)
의 산소를 찿는다고 작대기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 대밭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무덤으로 보이는 형체는 찿을 수가 없어
화당리 마을로 가서 수년전에 문중답을 찿으러 형님 두분(영은, 정남)이 왔다가
수소문 끝에 만났다는 종친댁을 찿아 갔습니다
그 당시 산소를 직접 알려 주었다는 어른(팔순)은 돌아가셨고
아주머니만 계셨는데 그 아주머니가 사촌 시동생을 불러 주셨는데
그 분이 산소 자리를 안내 해 주었는데
우리가 찿던 대밭은 옛날에 논(畓) 이었기에 거기는 묘가 들어설 자리가
아니라며 그 위 언덕배기에 있는 산소 2기를 안내 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아래쪽에 있는 묘가 추측컨데
5대조 조부의 묘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향 명칭이 거운지인데
경상도 사투리로 겐지라고 통용되어져 왔는데
그 종친도 거운지는 생소하고 겐지라는 마을 이름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또한 "팔도"라는 조부가 살았다고 하는데 그 분은 잘 몰랐고
정남이 형님 말로는 돌아가신 종친은 잘 알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족보상 기재되어 있는 5대조 조부의 남촌 墓는 확인이 된 셈입니다
지나고 나서보니 스마트폰으로 사진이라도 촬영해 올걸 후회 막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