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4.09.01(일) 벌초하는 날

버팀목2 2024. 9. 1. 15:24

2024.09.01(일), 음력 스무아흐레 날, 맑음

 

 

 

 

 아버지 산소에 벌초하는 날이다.

 둘째 조카 석정이와 매년 둘이서 연례행사로 하는 날이다, 산소로 출발하기 전 마침 가승보(家乘譜)를 펼쳐 보았더니 음력 7월 스무아흐레날인데 어제와 오늘 양일간 문중 벌초하는 날이어서 내가 선택한 택일이 절묘한 타이밍이었지 싶었다. 이제는 선대 조상님들의 산소는 6대조 조부님이 남겨주신 선산 유산 문제로 집안 갈등을 30여 년간 겪다가 타결점을 찾아 묘지는 전부 소산(燒散) 시키고 산소땅은 매각하여 제실(祭室)로 대체하고, 마지막 아버지 산소 하나만 남았다.

 내 청년시절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다. 작은아버지, 오촌 당숙, 집안 팔촌들까지 모여서 벌초 날자는 가승보에 이미 정해져 올려져 있었기에 그날 함께 벌초를 했다. 벌초가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술 한잔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곤 했었다. 이제는 어른들 다 돌아가시고 나니 ···. 게다가 아버지 산소만 남아있으니 조카와 둘이서만 다니게 되었다. 이제 벌초가 예전과는 다르다. 자식에게 할아버지 묘소를 알려 주었건만 바쁜 세상에 할아버지 묘소를 챙길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김해김 씨 삼현파 육십구 세 손으로, 입고성(入固城) 한 육십사 세 손 현연(顯連, 號 性會) 육 대 조의 후예이시다. 나의 고조부(金鐘奎)는 고종 황제의 경복궁 복원 공사 때 재물을 헌납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死後)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칙명(勅命)을 받은 것으로 보아 집안이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식솔들이 늘어나 분가(分家)하면서 아버지는 조부로부터 자갈논 서마지기 반과 산중 밭 다섯 마지기를 물려받았다. 자식은 십이 남매를 출산했으나, 여섯을 가슴에 묻고, 성인으로 성장하여 혼인한 자식은 육 남매였다. 나는 그중 막내로서 아버지 쉰다섯, 어머니 마흔넷에 태어났고 내 나이 열두 살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 그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자라면서 형제들과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부모와 자식들 부양으로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촌부(村夫)였던 것으로 보였다.             

 석정이와 9시에 만나기로 하고 큰 집으로 갔는데 집 앞에 큰 조카 승용차가 서 있길래 웬일인가? 싶었다. 내 기억에 직장에서 주말에도 근무한다는 핑계로 최근에 벌초에 참여하지 않던 조카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다니 무슨 영문인지? 아니나 다를까? 둘째 조카가 하는 말이 형은 온몸에 두드르기 나서 벌겋게 되어 누워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싶었다.

 옛말에 '못 생긴 소나무가 선산(先山) 지키고, 못난 자식이 부모 산소 지킨다'더니 애당초 아버지 산소는 벌초는 나와 석정이 몫이었다.

 예초기가 마당에 놓여있기에 시운전을 해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어제 큰집에 미리 와서 예초기 날도 새것으로 갈았고, 시운전도 해 보았다고 한다. 조카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집안 평지풍파도 없었을 텐데 하며 지난번 큰 형님 초상을 치르고 난 뒤의 일들이 스크린처럼 눈앞을 잠깐 스쳐 지나갔다. 농기계 창고 속에서 까꾸리 하나를 챙기고 내가 가져간 톱, 낫, 괭이가 든 등산 배낭을 메고 마을 앞에 있는 산소로 갔다. 2년 전 겨울에 칡덩굴을 대대적으로 걷어 냈는데, 작년에는 히말라야 트레킹 간다고 오지 못했더니 그래도 추석 지나고 산소에 왔더니 벌초는 되어 있었는데 올해는 진입로부터 칡덩굴이 장난이 아니었다. 석정이가 예초기로 대충 훑고 지나가면 내가 뒤따라가며 낫으로 정리를 해 나갔다. 온몸에 땀범벅이 되었다.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되어 말끔하게 벌초를 마무리했다. 내가 준비해 간 술과 간단한 안주를 차리고는 둘이서 절을 하며 마음속으로 고했다.

 '자식들에게 복(福)을 주시든지 벌(罰)을 주시든지 그것은 아버지의 영역이니까 알아서 처분하시고, 지난해는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계획으로 성묘를 못 왔고, 올해는 추석 연휴 때 가족 여행관계로 성묘를 못 오니 이해 해 주십시오'. 

 벌초를 마치고 둘이서 큰 집으로 갔는데 인기척이 없어 석정이한테 형수님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코로나에 감염되어 일주일 정도 고생을 하더니 그래서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서 서울에 있는 누나집으로 휴양차 갔다고 했다. 그런데 큰 조카는 밖에서 인기척이 방안에도 들릴만 한데 내다보지 않았다. 벌초 마치면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지려고 했었는데 열한 시도 안되어 그만 헤어졌다. 나는 승용차를 타고 먼저 출발해서 학섬휴게소에 들러 냉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그곳 전망대에서 서서 상념에 잠겼다. 내가 죽고 나면 아버지 산소 벌초하는 일도 끝날 것이고 그러면 내 묘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시대는 변했다. 유교적인 관습은 잊힌 지 오래다. 자식들에게 부모 묘소는 쓰지 말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학섬[鶴島]을 내려다보며 가슴속에 응어리를 쓸어내리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왠지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