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5.02.09(일) 뫼오름 시산제

버팀목2 2025. 2. 9. 06:36

2025.02.09(일) 맑음 5°/-6° 체감-9°


 

아침식사는 부일복국식당에서 복매운탕으로 해결했다.

 

11층 헬스장 뷰에서 바라본 거제 쪽 새파란 하늘

 

 

정월 초이틀 상현달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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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추   위

어제 까지 패딩 점퍼가 무색하리 만치
선량하게 놀던 겨울이 밤 사이 불량한 정치에 물들었는지
복병처럼 달려들어 겁탈하는 아침

반항 조차 할 수 없도록 예민한 부위부터
맵게 물고 늘어져 순식간에 얼얼해진 손

목이 움츠려 들게 귀를 사정없이 핥더니
매운 입김 앞세워 코가 훌쩍이도록
들락날락 드디어 입술마저 굳도록 채워나가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

아 ~
얼마 못 가 무너질 것 같은 남자의 자존심
쌍방울 마지노선

가만
속수무책인 이목구비 늦게 범하는 걸로 보아 생판에 정면 충돌하려니 그래도 양심이 있었나

아니면
평소 내가 그렇게도 낯이 두꺼웠나


☆* 시 전 집 *  중에서 /  권   오  범       글


♤     에     필     로      그

추위를 툭툭 차 본다
반응이 없다
추위란 놈의 본성을 건드린 발끝만 얼얼하다

추위를 툴툴 털어본다
털 수록 추위의 흡반이 집요하게 달라
붙는다 온몸이 오싹하다

가난에 강한 추위가
달동네 골목을 휘어잡더니
구멍 숭숭 뚫린 창문을 염탐하다가
홀로 사는 노인의 차가운 등 허리 주름진
비탈을 노린다
끝에 살기가 돈다

추위 주변에는 언제나 냉기가 서식한다
움츠린 허기가 냉동되고 있다
따끈하게 데워진 소식은 영영 없는 것일까

추위를 툭툭 건드려 본다
얼어  있다
손 끝이 어리다

☆ 추 위  /  이    길    옥

☆* 시 전 집 * 중에서 ♡


 오늘 벽방산 안정치에서 뫼 오름 산악회가 시산제를 지낸다고 문자메시지가 여러 차례 왔었는데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했다.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마침 한아름 단톡방을 보니 산악연맹 회장인 승용이가 다녀온 모양이었다. 승용이가 참석할 줄 알았더라면 사전에 연락해서 같이 참석할 걸 후회스럽다.   

 

 

나는 소먹이는 목동

 

김 봉 은

 

 나는 ‘소먹이는 목동’이었다. 한때는 ‘소 먹인다’라는 말이 싫었던 적이 있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등교하기 전에 소를 끌고 가서 풀을 뜯어 먹이고는 뒷산 소나무에 매어 놓고 학교로 갔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다시 그 소를 몰고 마을 인근 들이나 산에서 풀을 먹이고 집으로 몰고 오는 게 내 일과이었다.

 어쩌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라도 하고 늦게 오면 뒷산에는 다른 소들은 없고 우리 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나를 쳐다보는 소의 눈빛이 애처로워 보였다. 하굣길에 잔망을 피우다가 배를 곯게 했다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미안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얼른 냇가로 소를 몰고 가서 물부터 먹이고 나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른 아침에 반바지 차림으로 소를 몰고 나가면 깔따구가 정강이를 물어뜯어서 내 정강이는 성한 날이 없었다. 풀을 먹인 소를 마을 뒷산 덩치 큰 소나무에 매어 놓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학교 갔다 와서 빨아놓은 교복 상의를 걷어서 거북선 닮은 다리미를 들고 부엌에서 숯불을 담아 다림질했다. 집에서 중학교까지는 시오리 비포장길로 차량이 한 대 지나가면 뽀얀 먼지로 인해 한동안 앞이 보이질 않는다. 비 오는 날에는 차량이 빗물을 튕겨 교복을 버리기 일쑤고, 도로 사정이 그러하니 하얀 교복 상의가 성할 날이 없었다.

 마흔넷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빈촌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 일이 많았다. 밭에서 시금치 캐고, 갯벌로 가서 조개를 파거나 자연산 굴을 까고, 밭에는 옥수수 심어서 삶아 파는 등 엄마는 슈퍼우먼이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 마을에 시집와서 사는 여자들은 오십 줄에 접어들면 전부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밭에서 농사지은 채소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팔아서 내 교복과 등록금을 대기 때문에 어머니가 교복을 다림질해 주기를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그나마 중학교라도 다닐 수가 있기에 소 풀 먹이는 일이나 교복 다림질에 대해 불평할 수 없었다.

여름철 볏논에 멸구 약이나 도열병 약은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에 농약을 쳤다. 농약을 치는 펌프질은 내 차지였다. 어린 마음에 시오릿길 학교에 다니기도 고달프고 아침저녁으로 소 풀을 먹이러 다니는 일도, 겨울철 소죽 끊이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소는 집에 중요한 자산인데 어떨 때는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봄날 오후에 소를 돌본다는 핑계로 친구에게서 빌려온 책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햇볕 따스한 곳에 앉아 ‘알퐁스 도데’의 「별」을 읽기 시작했다. 친구가 연애 책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나서 빌렸는데 읽어 갈수록 글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 마음속에도 소설의 목동처럼 아리따운 아가씨를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 자신이 ‘소먹이는 목동’이라는 게 싫지 않았다. 우리 동네가 알프스의 깊은 산골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한창 사춘기 때였으니 뭔가 쿵 하고 가슴에 와닿았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나는 어느새 알프스의 맑은 산속에서 양 떼를 돌보는 목동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산 위의 목장에서 두 주일마다 양식을 실어다 주는 꼬마와 노라드 아주머니 오기를 기다린다. 그들이 오기로 한 어느 일요일 소나기가 내렸고, 비가 그치자, 그때야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노새를 끌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아가씨가 마을 소식을 전해 주지만 그 이야기는 관심 밖이었고, 나는 귀여운 아가씨를 보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스테파니는 목장 안의 내 잠자리인 천막 안을 둘러보며 "혼자 지내면 외롭겠어.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나는 입속으로 '당신을 생각한다'라고 대답을 했다.
 식량을 내려주고 아가씨는 노새를 타고 돌아갔다. 나는 해가 질 무렵까지 스테파네트를 가까이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애틋한 꿈이 달아날까 두려워 손도 까딱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아가씨가 소나기로 불어난 강물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되돌아온 것이다. 옷을 말리기 위해 장작불을 피웠다. 천막에 새 짚을 깔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모피를 깔아 쉬도록 하고 천막 앞에 앉아 아가씨를 지켜주고 보호한다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 밤처럼 하늘이 넓고 깊어 보인 적은 없었고, 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았는지 그리고 별이 이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닥불 옆에 있겠다고 아가씨가 나와서 옆에 앉자 어깨 위에 모피를 걸쳐 주고는 나란히 앉아있는데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함께 산속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찰나에 별똥별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걸 보고 저게 뭐야? 속삭이듯 묻었다. 나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이에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대화를 이어가는 도중에 아가씨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포개지고 나는 아가씨의 잠든 얼굴을 보면서 꼬빡 밤을 지새웠다. 저 숱한 별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었다.

 

 행복에 겨워 가슴 벅차 하는데 “봉은아”하고 부르는 엄마의 소리에 눈을 떴다. 그 꿈을 끝까지 못 꾼 게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오늘 우연히 도서관에서 ‘알퐁스 도데’의 「별」을 보니 몇십 년 전의 봄날에 꾼 꿈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웃음이 나왔다. 누구에게도 말 안 하고 혼자 비밀창고에 간직해 두었던 이야기다, 꿈이 더 진행됐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주 아쉽다.

 나는 그날 이후로 더 부지런히 소를 돌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언젠가 스테파네트 아가씨처럼 아름다운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내 젊은 시절의 추억들, 꿈이든 현실이든 빛바랜 사진처럼 가슴 한쪽에 모아 두련다. 내 살아온 발자취며 소중한 추억이니까. 요즘도 ‘나는 소먹이는 목동’이란 말이 참 좋다. 스테파네트 아가씨 덕분이다.

▣. 양미경 선생님의 첨삭지도 본

 

 

소먹이는 목동

김 봉 은

 

 나는 ‘소먹이는 목동’이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등교하기 전에 소를 끌고 가서 풀을 뜯어 먹이고는 뒷산 소나무에 매어 놓고 학교로 갔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다시 그 소를 몰고 마을 인근 들이나 산에서 풀을 먹이고 집으로 몰고 오는 게 내 일과이었다.

 어쩌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라도 하고 늦게 오면 뒷산에는 다른 소들은 없고 우리 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나를 쳐다보는 소의 눈빛이 애처로워 보였다. 하굣길에 잔망을 피우다가 배를 곯게 했다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미안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얼른 냇가로 소를 몰고 가서 물부터 먹이고 나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른 아침에 반바지 차림으로 소를 몰고 나가면 깔따구가 정강이를 물어뜯어서 내 정강이는 성한 날이 없었다. 풀을 먹인 소를 마을 뒷산 덩치 큰 소나무에 매어 놓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학교 갔다 와서 빨아놓은 교복 상의를 걷어서 거북선 닮은 다리미를 들고 부엌에서 숯불을 담아 다림질했다. 집에서 중학교까지는 시오리 비포장길로 차량이 한 대 지나가면 뽀얀 먼지로 인해 한동안 앞이 보이질 않는다. 비 오는 날에는 차량이 빗물을 튕겨 교복을 버리기 일쑤고, 도로 사정이 그러하니 하얀 교복 상의가 성할 날이 없었다.

 마흔넷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빈촌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 일이 많았다. 밭에서 시금치 캐고, 갯벌로 가서 조개를 파거나 자연산 굴을 까고, 밭에는 옥수수 심어서 삶아 파는 등 엄마는 슈퍼우먼이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 마을에 시집와서 사는 여자들은 오십 줄에 접어들면 전부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밭에서 농사지은 채소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팔아서 내 교복과 등록금을 대기 때문에 어머니가 교복을 다림질해 주기를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그나마 중학교라도 다닐 수가 있기에 소 풀 먹이는 일이나 교복 다림질에 대해 불평할 수 없었다.

여름철 볏논에 멸구 약이나 도열병 약은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에 농약을 쳤다. 농약을 치는 펌프질은 내 차지였다. 어린 마음에 시오릿길 학교에 다니기도 고달프고 아침저녁으로 소 풀을 먹이러 다니는 일도, 겨울철 소죽 끊이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더욱이 우리 마을은 약 55호쯤 되는데 우리 또래 초등학교 동급생이 남녀를 합쳐 10여 명 되었는데 그중에서 중학교 진학은 공립학교 2명, 사립학교 1명이 전부였다.

 

 여름철 볏논에 멸구 약이나 도열병약은 꼭 일요일에 농약을 쳤다. 꼼짝없이 붙들려 농약을 치는 펌프질은 내 차지였다. 어린 마음에 시오릿길 학교에 다니기도 고달프고, 아침저녁으로 소 풀 먹이러 다니는 일도, 겨울철에 소죽 끊이는 일도 내 몫이었기에 도회지 친구들처럼 방과 후 공부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기에 불만은 컸었다.

 그 시절에 점심을 먹은 기억은 아예 없다. 점심시간이면 친구들이 도시락을 먹는 시간에 나는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도 있었다. 여름날 오후에 소 풀 먹이러 가는 중에 가매 등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 풀이 있는 곳에 소를 매어 놓고 바닷가로 가서 자맥질로 새조개나 꼬막도 잡아 구워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오뉴월 늦은 봄에는 남의 논밭에 있는 보리나 밀도 서리해서 구워 먹는 재미도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그런 일도 내 어릴 때의 추억으로 아슴푸레하게 클로즈업되어 오는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가슴 한쪽에 모아 두련다. 내가 여기까지 온 그것만큼이나 소중한 추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