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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의 공평함에 대하여

버팀목2 2025. 5. 22. 08:11

조물주의 공평함에 대하여

 

김 봉 은

 
 십사 년 전쯤의 야간 당직 날이다. 저녁 식사를 하고는 숙직실에 모닝콜을 맞추어 놓고 잤는데 눈이 떠졌다. 새벽 한 시경이 교대 시간인데 예정 시간보다 일찍 교대하고는 상황실 의자에 앉아 깜박 졸면서 꿈을 꾸었다,
 첫 번째 꿈은 음주 운전으로 직장에서 쫓겨나 고향에서 중고 자전거를 타고 어릴 때 뛰놀던 논둑길을 한참 달리며 고뇌에 차 있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실직자가 되었고, 자식 두 놈은 아직 출가도 못 시켰는데 마음고생이 심했다. 다시 복직하려면 공개채용 시험을 치러야 한다니 내일부터 시험 준비를 해야겠다며 중얼거리다가 눈을 떴다.
 한 바퀴 주변을 순찰하고 앉아 있으니 언제 또 잠이 들었다.
 두 번째 꿈은 군대에서 제대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징집통지서가 나왔다. 내일모레 머리 박박 깎고 훈련소에 들어가야 한다니 꿈속에서도 기가 막힌다.
 낙숫물 흘러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는데 기분 나쁜 꿈이다. 낮부터 내리던 비는 빗방울이 굵어져 소낙비로 변해 세상을 힘차게 두들기고 있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생각해 보니 얼마 전 뉴스에서 공직자가 음주 운전으로 파면당했다는 기사 때문인가 보다. 나는 근무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며 음주 운전은 절대로 안 하는데 무의식 중에 그런 꿈을 꾼 것 같다. 앞으로도 음주 운전을 하지 말라는 경고로 생각되었다.
 한동안 창문 밖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가, 같은 공간 다른 부서에서 야간 근무인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겨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 친구의 어깨너머에 섰다. 내가 등 뒤에 서 있는 것을 모른 채 그 친구는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고민거리를. 적는 것 같았다.
 

 나는 공무원인 처녀를 만나 맞벌이로 돈도 모았고 자식도 둘 낳았다. 얼마 전 가까운 지역에 밭이 딸린 전원주택도 사서 주말이면 달려가 고추, 상추도 심었다. 마루에 서면 발아래 커다란 저수지가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삼 년 전 직장암 수술 후 육 개월간의 항암치료를 받고는 이제 정상에 가깝다. 그런데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

 
 여기까지 읽고 난 뒤 더는 읽을 수가 없었다. 헛기침하면서 이 밤에 무슨 글을 쓰노? 하며 못 본 척하면서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겉으론 보기에는 남 부러운 것이 없어 보였고, 내 눈에 비친 그는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꿈꾸었던 모습인 노후에 전원주택에서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닭과 거위와 가축도 몇 마리 키우는 게 꿈이었다. 반려견과 더불어 내 손으로 농사지은 채소로 식탁을 꾸리고, 가끔 친구들을 불러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워 술잔도 기울이며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 그림 속의 주인공은 남다른 고민거리를 안고 살아간다는 비밀을 오늘 훔쳐보게 되었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다 주지 않는구나, 공평하심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전원주택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강인한 체력은 타고났지 않은가. 그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이제 정년을 사 년 앞두고 있다. 고향마을 이웃에 부모의 유산을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형제간에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는데 우리 집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내 위에 셋째 형은 울산에 살고 있는데 울산 인근에 아주 값싼 임야가 부동산에 나왔다며 구매했다가 되팔아서 갚겠다며 제 몫을 챙겼다. 큰 형님이 빌려 간 돈을 돌려 달라고 할까 봐서 부모님 기일에도 오지 않았고 ‘울산 김가’가 되었다. 근 이십여 년간 소식을 끊고 살다가 결국 지친 큰 형님이 돈 안 받을 테니 부모님 기일에는 참석하라고 해서야 오게 되었다.
 그 여파로 인해 말단 공직생활 쥐꼬리만한 봉급에도 내몫 달라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 오지 못해 나는 평소 고향에 땅뙈기 한 평 없는 그것이 한(限)처럼 어깨를 누르곤 했는데 이제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다. 큰 시련 없이 여기까지 왔고, 자식 두 놈 부모 속 썩인 적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이다. 남은 임기 잘 마쳐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건강 잘 챙겨가면서 손주 재롱 보며 가족들과 알콩달콩하게 여생을 보내야겠다. 神은 정말 공평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