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먹이는 목동
김 봉 은
나는 ‘소먹이는 목동’이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등교하기 전에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뜯어 먹이고는 뒷산 소나무에 매어 놓고 학교로 갔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다시 그 소를 몰고 마을 인근 들이나 산에서 풀을 먹이고 집으로 몰고 오는 게 내 일과이었다.
어쩌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라도 하고 늦게 오면 뒷산에는 다른 소들은 없고 우리 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나를 쳐다보는 소의 눈빛이 애처로워 보였다. 하굣길에 잔망을 피우다가 배를 곯게 했다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미안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얼른 냇가로 소를 몰고 가서 물부터 먹이고 나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른 아침에 반바지 차림으로 소를 몰고 나가면 깔따구가 정강이를 물어뜯어서 내 정강이는 성한 날이 없었다. 풀을 먹인 소를 마을 뒷산 덩치 큰 소나무에 매어 놓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학교 갔다 와서 빨아놓은 교복 상의를 걷어서 거북선 닮은 다리미를 들고 부엌에서 숯불을 담아 다림질했다. 집에서 중학교까지는 시오리 비포장길로 차량이 한 대 지나가면 뽀얀 먼지로 인해 한동안 앞이 보이질 않는다. 비 오는 날에는 차량이 빗물을 튕겨 교복을 버리기 일쑤고, 도로 사정이 그러하니 하얀 교복 상의가 성할 날이 없었다.
마흔넷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빈촌에서 들녘에 논보다 밭이 많다 보니 아버지보다 어머니 일이 많았다. 밭에서 시금치 캐고, 갯벌로 가서 조개를 파거나 자연산 굴을 까고, 밭에는 옥수수 심어서 삶아 파는 등 어머니는 슈퍼우먼이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 마을에 시집와서 사는 여자들은 오십 줄에 접어들면 전부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밭에서 농사지은 채소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팔아서 내 교복과 등록금을 대기 때문에 어머니가 교복을 다림질해 주기를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그나마 중학교라도 다닐 수가 있기에 소 풀 먹이는 일이나 교복 다림질에 대해 불평할 수 없었다.
여름철 볏논에 멸구 약이나 도열병약은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에 농약을 쳤다. 농약을 살포하는데 펌프질은 내 차지였다. 어린 마음에 시오릿길 학교에 다니기도 고달프고 아침저녁으로 소 풀을 먹이러 다니는 일도, 겨울철 소죽 끊이는 일도 내 몫이었다. 도회지 친구들처럼 방과 후 공부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기에 그래서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더욱이 우리 마을은 약 오십오 호쯤 되는데 우리 또래 초등학교 동급생이 남녀를 합쳐 십여 명 되었는데 그중에서 중학교 진학은 공립학교 두 명, 사립학교 한 명이 전부였다.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은 일찍부터 가까운 도회지로 나가서 자개공이나, 통발배 선원으로 취업 일선에 진출하는 예도 있지만, 거의 부모님 밑에서 논밭일을 돕거나 땔감을 구하러 다니기 때문에 그들에 비해 중학교라도 진학한 우리는 부모 일을 도우며 사는 그들과 비교 대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시절에 점심을 먹은 기억은 아예 없다. 점심시간이면 친구들이 도시락을 먹는 시간에 나는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도 있었다. 여름날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와서 소 풀 먹이러 가는 곳에 가매 등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있었다. 그곳 풀이 있는 곳에 소를 매어 놓고 바닷가로 가서 자맥질로 새조개나 꼬막도 잡아 구워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오뉴월 늦은 봄에는 남의 논밭에 있는 보리나 밀도 서리해서 구워 먹는 재미도 있었다.
또 다른 곳은 미륵골이라는 벽방산 줄기 아래 통영과 고성의 경계 지점이었는데 이곳은 우리 마을 소들과 원산리 평촌 마을 소들이 풀을 뜯는 장소로 자연스레 일면식도 없는 또래들이 모여 얼굴을 익히고 씨름판도 벌이곤 했었다. 그렇게 친목을 쌓게 되어 우정을 나누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삼 학년 무렵 어느 여름밤에 그 동네 골목대장 격인 YO가 그 마을 또래 처녀와 총각들을 몽땅 데리고 우리 마을을 처음으로 친선 방문했다.
마을 구판장에서 내가 그들을 접대했는데, 유일하게 내 시선을 끄는 BN이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불꽃이 튀었다. 돌아가는 길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연스레 한여름 밤의 어둠 속에서 둘이 함께 통성명하게 되었고, 다음날부터 연서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이 연애 감정을 키워가며 뜨겁던 여름을 불태우듯이 보내고 오곡백과 익어가는 가을에는 우리의 사랑도 익어갔다.
그해 겨울 음력 설날을 앞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입영통지서가 나왔다. 나는 그 당시 부산 남구 문현동에서 큰 누님 댁에 임시 거처를 두고 보세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는데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 왔다는 연락을 받고는 고향 집으로 내려왔다. 휴대전화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송골 고개를 넘어 평촌마을로 가서 친구 OY를 만나서 마을 구판장에서 당시 최고의 안주인 꽁치 통조림을 연탄난로 불에 데워서 소주를 마시며 내가 군대 입영통지서를 받았다며 너스레를 풀어가며 술자리가 익어갈 무렵 마을 구판장에 달리 화장실이 없고 그냥 출입문 앞에 강둑에 나와 볼일 보고는 돌아가려는데 문득 내가 OY를 만나 술 마시려고 온 것이 아니고 BN이 보고 싶어 만나러 왔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우치고는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시골의 겨울밤은 적막 그 자체였다. 깨금발로 담장 넘어 집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부모님이 계시는 큰방과 그녀가 있는 작은 방에 오 촉짜리 백열등이 켜져 있었다.
순식간에 대문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충동질에 양철 대문을 넘는 순간 그만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내가 그 집안에 떨어졌다. 마루에 매달린 오 촉짜리 백열등이 켜지면서 “거기 누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꼼짝달싹할 수 없이 나는 큰방 앞으로 불려 갔고, 이어서 방안으로 가서 그녀의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다.
어디서 무슨 연유로 왔으며, 출신 마을과 부모 성함을 물었다. 내 옆에는 어느새 작은방에 같이 있던 그녀의 여동생이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무렵 어른에게 아뢨다. “소피 좀 보고 오겠다”고 그러고는 지붕을 타고 뒷집 후배의 집으로 도망갔는데 온 동네 개들이 합창하듯이 울부짖었다.
그리하고는 군대를 갔다. 훈련소에서 그날 밤의 죄책감으로 삼 년 동안 기다리지 말고 내보다 나은 남자가 나타나면 시집가라고 편지를 썼다. 일 년 정도 시간이 지나 군대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남해에서 그녀로부터 편지가 왔다. 주소가 남해읍 남변동 경향신문사 지국이었다.
편지를 받은 얼마 후 갑작스레 부대 평가 훈련 우수로 일주일간의 포상 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동안 주고받았던 편지와 그녀의 사진까지 챙겨서 고향 집이 아닌 남해로 갔다.
오후 늦게 가정집인 경향신문사 지국을 찾아 대문을 두드렸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대뜸 그녀가 기다리던 군인 아저씨라며 아는 체를 하면서 며칠 전 부산에 볼일 보러 갔는데 오늘 저녁에 올 예정이라며, 현재 처한 상황을 대충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당시 남자와 그 집에서 동거하면서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어렵게 산다고 그녀가 오면 데리고 떠나라고 했다.
돌아서서 나와서는 터미널 부근 숙박업소에 투숙했고, 밤새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했고, 이른 아침 남해에서 진주로 출발하는 첫차를 탔다. 맨 뒷 좌석에서 내가 소지하고 있던 그녀로부터 그동안 와서 모아 두었던 편지와 사진을 찢어서 모자에 담았다.
남해대교를 통과할 무렵 창문을 열고 모자에 담긴 추억을 바다에 흩날렸다.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내 첫사랑은 그렇게 남해 바다에 수장되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그런 일도 내 어릴 때의 추억으로 아슴푸레하게 클로즈업되어 오는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가슴 한쪽에 모아 두련다. 내가 여기까지 온 그것만큼이나 소중한 추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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