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2024.07.06(토) 한산도 망산

버팀목2 2024. 7. 7. 19:50

 

한산도 망산 

 

 

 당초 계획은 9월에 떠날 키나발루 산행에 앞서 신청자 21명이 사전에 산행을 통해서 수인사라도 나누고 얼굴이라도 익히자고 김종진이가 제안하여 욕지면 두미도 천황산으로 산행을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06:50경 두미도행 여객선뿐만 아니라 매물도, 욕지도, 연화도행 여객선이 안개로 출항이 통제되었다. 통제가 없는 제승당 행 여객선으로 한산도 망산으로 가자는 의견이 모아져 출발 10분을 남기고 제승당행 승선권을 구매했다. 참석자가 9명이었다. 07:00경 제승당행 한산농협카페리호에 승선하여 제승당에 도착해서 산행 들머리로 이동했다. 

 바다백리길 2구간 한산도역사길 초입에 섰다. 여객선에서 하선하여 불과 10여분 500여 미터를 걸었을 뿐인데 온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일행들을 먼저 출발시키고 나는 혼자 남아 데크 위에서 환복을 했다. 간편복으로.

 제승당에서 망산까지 4.7km, 망산에서 진두까지 A코스는 2.5km, B코스(야소)는 2.8km로 야소에서 진두까지 약 300m를 더 걸어야 된다 싶어 A코스를 선택했다. (7.2km, 3시간 소요)

 한산도역사길을 탐방하면서 각종 안내문(임진왜란 관련 지명 유래 등)을 사진촬영하여 첨부하였던 전례와 달리 이제 이에 적힌 안내문을 필사함으로써 한산도역사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길 것이다. 

 

   

 

 

▣. 1920년대 통영항 전경과 통영의 지명유래 :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삼도수군통제영은 경상좌 · 우수영, 전라좌 · 우. 수영, 충청수영을 통괄하는 조선이 최대 군영이었다.

통영지도는 고종 2년(1865년)에 제작된 1첩(1면)의 채색도이다.

원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크기는 115 ×69.2cm(200 ×120cm로 확대된 것임)로 제작연대가 확실한 작품이다.

주요 관아는 물론 건물이 잘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통제영 지도 중 가장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통제영 경내의 동선(動線) 격인 도로도 보석(步石)으로 표현되어 있고 석축, 계단, 나무, 장승 등이 당시 위치와 일치하게 그려져 있으며, 지형의 고저(高低)도 어느 정도 판단할 수가 있다.

'하늘의 은하수를 가져다 피 묻은 병장기를 닦아낸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세병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육지인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지어진 객사건물이다.

세병관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 「세병마」에서 가져온 것으로, 성인 남자의 키보다도 더 큰 현판의 글씨를 보고 있자면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에 각각 수군절도사를 두어 지휘하게 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하여금 조선의 수군을 담당하게 하는데 처음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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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작전사령부였던 '한산도'

한산도를 소개하면 통영에는 5백여 개의 유무인도가 있는데 그중 한산도가 전국에서 38번째 큰 섬입니다.

한산면은 본도와 주변에 산재한 도서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총 29개 유무인도를 포함하면서, 일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목장으로 쓰였던 곳으로 조서초기 문헌《경상도속찬 지리지(1469년)》에 이미 「한산도목장」으로 지명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수로 상에 있었습니다.

지리상으로 전형적인 익곡만(지반의 침강이나 해면의 상승으로 육지에 바닷물이 침입하여 해안에 생긴 골짜기= 빠진 골)으로 만의 입구가 게의 집게다리 모양을 하고 있고, 내만에 또다시 깊은 몇 개의 작은 만을 안고 있어 수군기지로서 찾아보기 힘든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이러한 지형을 익히 알고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당시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통괄하기 위한 산도수군통제령을 이곳에 만들었습니다. 이곳 한산도는 당시 모든 마을이 무기, 식량등을 담당했으며. 제승당은 이 모든 것을 총괄하던 곳입니다.

현재의 해군작전사령부라 할 수 있습니다.

  

 

▣. 한산해전의 의의 :

     옥포 · 당포 · 당항포 등지에서 조선 수군에 패한 왜군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병력을 보강하고 육군과 협력하면서 총공격을 준비했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와 연합해 적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조선군은 적이 퇴각하기 어려운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투를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592년 7월 7일 대 · 중 · 소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가자 먼저 작은 배 5,6척으로 적의 선봉을 공격하다가 거짓 후퇴했다. 유인작전에 속은 일본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까지 따라 나오자 조선군은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 총과 포를 쏘며 총공격을 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60여 척이 불타고 수백 명의 왜군이 물에 빠지거나 조선군에게 사살되었으며, 4백여 명의 왜군은 한산도에 상륙하여 풀과 나무뿌리로 연명하닥 겨우 탈출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일본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져 조선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임지왜란의 3 대첩 하나로 손꼽힌다.

 

◈. 세계 4대 해전(海戰)

1. 1592년 대한민국(조선)

    명량해전(鳴梁海戰)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

2. B.C. 480년 그리스

    살라미스(Salamis) 해전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제독

3. 1588년 영국

    칼레(Calais) 해전

    하워드(Howard) 제독

4. 1805년 영국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넬슨(Nelson) 제독   

 

 

제승당에서 망산까지 4.7km, 망산에서 진두까지는 2.5km이다. 총 7.2km이다

 

 

멧돼지는 산중 먹이활동에서 부족한 나트륨을 보충하기 위해서 땅속을 파헤쳐 지렁이를 먹는다는 說이 있다. 

 

 

지나온 오르막.

 

 

계속되는 오르막길

 

 

▣. 장군의 삶에 바치는 시호, 충무공

 조선시대에는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가운데 나라에 큰 공이 있으면 사후에 시호(試號)를 내렸다.

시호는 살아생전의 행적을 참고하여 신중하게 결정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내려진 시호는 '충무'이다.

 

▼이순신의 등과교지

   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며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치욕을 막는 것을 '무(武)'라 한다는 뜻의 

충무(忠武)는 무관에게 가장 영예로운 시호였다.

이순신 장군의 공적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올랐고,

순국한 지 45년이 지난 1643년(인조 21년)에 드디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嶺議政)의 직함이 더해졌고

그 직함이 82자에 이르렀다.

이러한 직함은 무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한 이순신 장군의

치열했던 삶에 바치는 역사의 훈장이다.   

 

 

 

 

직진하면 망산, 좌틀하면 소고포, 뒤돌아가면 제승당이다.

 

 

망산교

 

 

망산 정상의 시그널(진두 2.5km, 야소 2.8km) 

진두는 임진왜란 때 진영이 있는 곳이고, 현재는 한산면사무소가 있는 한산도의 소재지이고 중심지이다. 마을버스나 식당등을 이용하려면 망산에서 야소쪽으로 하산하면 진두 쪽으로 약 4~500m 도로로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망산 해발 293.5m

 

 

한산도 망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관(남, 동쪽) 

좌로부터,

거제 가배리, 노자산, 거제 탑포리, 가라산, 추봉도(예곡), 거제 저구리, 거제 망산, 추봉도, 장사도, 가왕도, 죽도, 대매물도, 봉암해변, 소매물도, 용초도, 비진도.

 

 

 

망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관(북, 동쪽)

좌로부터,

소고포 선착장, 거제 술역리, 소록도, 비산도, 거제 어구리, 좌도, 산방산.

 

 

▣. 한산도 지명유래 :

 

대       섬(竹島)  : 시루대의 자생지이며, 여기서 생산된 대로 임란 당시 화살을 만들었던 곳

해갑도(解甲島)  : 갑옷을 벗었던 곳

문어개(問語浦)  : 왜적이 길을 묻던 곳

개  미  목(蟻項)  : 지형이 개미의 허리처럼 생긴 데다가 한산대첩 때 일본 패잔병들이 개미처럼 올라갔던 곳

매       왜      치  : 왜적의 시체를 매장하던 곳

두억  개(大村)  : 왜적의 머리를 수없이 베었던 곳

진      터       골  : 육상 전투 교육훈련을 하던 곳

비  추  리(汝次) : 병선을 건조, 수리하던 곳

염                 개 : 소금을 만들던 염전이 있던 곳

숯   덩   이    골 : 숯을 만들던 곳

독   안   바    위 : 질그릇을 만들었던 곳

창       동(倉洞) : 군수품 창고가 있던 곳

진       두(津頭) : 진영이 있던 곳

야       소(冶所) : 무기를 만들던 곳

옷  바 위(衣岩) : 군복을 마련하던 곳

용      초(龍草) : 병장기를 만들기 위하여 사철을 채굴하던 곳

멜      개(荷浦) : 군수물자를 하역하던 곳

못               개 : 식수를 마련하던 곳

망     산(望山) : 왜적의 동정을 살피던 곳

돛     단      여 : 임란당시 이 암초에 돛을 많이 올려 대선단으로 위장했던 곳   

 

 

 

 

망산 정상에서의 휴식

 

망산 정상에서 진두 쪽으로 이동하면 팔각정이 위치하고 있다.

 

 

 

추봉교

 

 

 

 

 

진두에서 바라본 봉암 방파제

 

 

추봉교 밑 저 해안가를 돌아가면 옛 한산도 본 섬사람들이 초상이 나면 화장터로 사용하던 장소이다.

 

 

 

한산 보건지소 앞 어린이보호구역 교통시설물 앞 도로 끝단에 원추리 꽃을 누군가가 심었을 리는 없고 자연적으로 자랐을 것이다.

 

 

물회로 점심 먹었던 한산식당(한산 보건 지소 뒤)

 

 

점심을 먹고 나니까 12:00였다. 진두에서 제승당으로 가는 버스는 13:30경 출발한다고 한다. 1시간 거리라고 하여 도로로 걷기로 했다. 그런데 제일 후미에서 걷고 있는데 진두 쪽에서 버스가 오길래 손을 들고 세웠더니 친절한 버스기사가 제승당행 버스는 13:30에 진두에서 출발한다고 알려 주었고 이 버스는 추봉교를 건너 곡룡포 쪽으로 진행해 갔다.

 

 

 

 

 

장재도?

 

 

 

 

 

창동마을

 

 

창동마을 앞 갯벌(건너편 마을은 장곡마을)

 

 

 

 

 

창동마을 앞 조개 파는 마을 주민들

 

 

 

개똥골? 마을 이름하고는 좀 어색하다

 

 

제승당과 한산대첩비(대촌, 개미목 <의암>, 두억개, 문어포) 교차로

 

 

 

벌통골 정류장

 

 

장곡마을 권현망 어장막

 

 

선두는 제승당으로 직행하고 후미는 독암마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정류장 부근 주택 화단에 있는 능소화가 만개하고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독암마을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이러고 있는 동안 차라리 소고포, 대고포, 제승당을 향해 도보로 이동할 것을 버스를 타고난 이후에 후회했다. 진두에서 제승당 방향으로 진행해 오던 버스는 우리 일행을 태우고는 대고포에서 여차길로 우회전하여 관암선착장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여차마을 회관을 지나서 좌측 역졸길로 접어들어 역졸 선착장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와서 제승당으로 갔는데 도보로 이동했으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해당화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제승당

 

 

제승당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의항마을 선착장에 들렀다가 통영항으로 향하고 있다.

 

 

하죽도와 상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