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가슴으로 쓰는 글’을 읽고
김 봉 은
고동주 선생이 쓴 수필을 보면 나이 쉰에서 예순 사이에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내 나이 종심(從心)이다. 선생보다 이십여 년 늦게 글쓰기에 입문해서 습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가 사십여 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난다. 갑자기 나를 위안하는 한마디가 떠올랐다.
‘시작이 반이다.’
작가와 같은 지역에서 사십여 년간 살았지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내가 수필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지면을 통해 만나기 시작했다. 영면(永眠) 이 주기에 즈음하여 수필집 『사랑 바라기』가 재출간되었다며, 그분 따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쉰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신들린 사람처럼 단숨에 읽었다. 완독하고 나서 수필집 위에 가만히 손을 얹고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제목이 ‘가슴으로 쓰는 글’이다.
어쩜 내 고민을 명경明鏡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는 “이 사람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다”라는 표정일까 두렵다. 작은 감동이라도 전달할 수 없는 글이라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슴으로 쓰는 글> 중에서-
나는 고백건대, 원고지에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어릴 적에는 공책에 연필로 침을 묻혀 가며 일기를 써 왔고,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 손수 체득한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려 블로그에 일기를 써 왔다. 체계적으로 글쓰기 공부를 해 볼 기회도 없었다.
항상 먹고 살기가 급급해 직장생활에서 상급자 눈치 보기와 동료와의 실적관리 경쟁에 혈안이 되다시피 하며 마음의 여유가 없이 쫓기듯이 살았다. 지나고 보니 별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듬성듬성 어깨 너머로 타인이 쓴 글을 훔쳐본 것이 고작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양미경 수필 교실’을 만났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수필집을 통해 이 글을 읽고는 어릴 적 볏논에서 어른들 따라 논매다가 논고랑에서 동전이라도 주운 기분이 들었다.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퇴고를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주제와 무관한 군더더기는 없는가. 소재와의 연결은 자연스러운가. 삶의 탐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가. 글의 여백은 적정하며, 문학성은 어떤가. 문장은 제대로 짜여졌으며, 어미語尾 처리의 반복 부분은 없는가. 흐름이 자연스럽고 호흡은 고른가. 교훈적이거나 아는 체한 부분은 없는가. 어휘 하나하나는 적절하게 선택되었는가. 빠진 부분은 없는가…. 흔히 수필 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온갖 기준을 동원해 놓고 애를 태운다. 이렇듯 퇴고는 부담스러운 과정 중의 하나다.
-<가슴으로 쓰는 글> 중에서-
이 수필을 가끔 보면서 좌표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슴에 울림을 주는 글 한 편이라도 써보고 싶다. 내 손에 이 책을 준 그분에게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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