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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올레길 -최종본-

버팀목2 2024. 11. 13. 10:12

 

 

추자도 올레길

 

김봉은

 

 추자도 올레길을 간다기에 선 듯 따라나섰다. 나름대로 인터넷으로 추자도의 비경을 프린트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통영에서 새벽 2시에 일행 5명이 봉고차를 타고 진도항 여객선터미널까지 4시간에 걸쳐 달렸다. 봉고차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붙일만하면 운전자가 초행길이고, 우천으로 어두운 도로에서 급제동을 수시로 하는 통에 이승과 저승을 왔다 갔다 했다. 팽목항에 도착하니 허허벌판이었다. 보성을 지날 즈음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오전 6시 팽목항에 도착하니 장대비로 바뀌었다.

 터미널 맞은편 편의점에서 씨월드고속훼리 승무원 상대로 하는 간이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종일 추자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아침에 먹은 시래깃국에 참조기 한 마리, 달걀부침이 최고의 밥상이었던 것 같다.

원래 산타모니카 호가 상추자 항에 입항하는데 썰물 때 수심이 얕아 접안하기 어려워 상추자항 내 갯벌을 파내는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추자도 신양항으로 입항했다. 그런 연유로 추자도 올레길을 하추자도에서 상추자도로 거꾸로 진행하게 되었다. 일기예보에 추자도 예상 강우량이 14mm라 했는데 열 배나 넘게 억수같이 퍼부었다. 선내에서 우중 트레킹 옷인 스패츠와 하의 비옷까지 챙겨 입고 배에서 내렸다.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18-2코스 시작점 스탬프를 빗속에서 찍고는 우의 입은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등산복 차림의 단체가 배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긴 했는… 나중에 상추자도 면 소재지에 도착해 보니 그 단체는 차량으로 관광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제주 본섬의 중간지점에 있는 추자도는 상·하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를 합쳐 42개의 군도(群島)로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1271년(고려 원종 12년)까지 후풍도(後風島)라 불렸다고. 추자도라는 지명은 전남 영광군에 소속될 무렵부터 추자도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태조 5년 섬에 추자나무 숲이 무성하여 추자도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우두일출(牛頭日出), 직구낙조(直龜落照) 등 추자 10경을 비롯한 수려한 해양경관을 보유하고 있는 추자도 연근해는 빠른 물살과 깊은 수심,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이다. 예로부터 고급 어종인 참조기, 삼치, 참돔, 방어 등이 회유하는 황금어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낚시꾼들 사이에서 최고의 낚시 포인트로 주목받고 있다. 궂은 날씨 때문에 추자도의 비경을 가슴과 눈에 담지 못하고 프린트해 간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추자도마을을 순회하는 마을버스도 운행되고 있었고, 상추자도 면사무소 앞에 18-2코스 종점과 18-1코스 시작점 스탬프를 찍는 곳이 있었다. 일행 5명 중 3명은 추자도 올레길만 걸으러 온 사람들이고, 둘은 제주 올레 종주를 하기 위해 패스포트를 소지하고 있다. 패스포트를 소지한 일행 1명은 먼저 찍고는 점심을 먹을 식당을 주선하러 갔다. 나 혼자 스탬프를 찍고는 돌아오니 일행이 보이질 않았다. 통화하고 찾아간 식당이 하필이면 돼지고기 두루치기 집이었다. 주문된 상태라 별말을 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삼치회, 전복회, 갈치조림 등 특산물도 많은데 집에서 가끔 먹는 돼지고기라니!

불현듯 네팔 히말라야 탐사 갔을 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집 나오면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잘 먹어야 여행길이 즐겁다"라며 현지식 카레밥을 맛있게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사실 그게 잘 안된다. 그래서 고생을 사서하고 일행들에겐 입맛이 까다롭다고 인식되어 있다. 실은 면 소재지 근처의 많은 식당 문에 쓰인 메뉴를 읽어 가면서 뭐로 먹을 것인지 생각을 했던 터라 내심 서운했다. 재밌는 상호가 있었는데 ‘옆구리 터진 김밥’이다. 분식집처럼 보이는데 제주 특산물인 '제주 갈치 조림'이었다. 연신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보니 인기가 있는 식당인 모양이다. 식사가 나왔는데 돼지 두루치기가 우리 세 사람 앞에 놓였다. 두 사람은 간 고등어구이였다. 내가 두루치기를 맛보라며 그릇에 떠서 주었더니, 고등어 한 토막이 우리 쪽으로 건너왔다. 간 고등어를 분배해서 겨우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식사하고는 18-1코스를 여객선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빨리 가야 한다며 서두는 바람에 강행군하다 보니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멘소래담’으로 응급조치를 했다.

상추자도 올레길 종점 스탬프를 찍고 신양항에 도착하니 오후 5시였다. 여객선은 7시에 진도항으로 출발한다고 하니 시간이 남아있었다. 추자도 올레는 1박 2일 일정으로 특산물도 맛보고, 멋진 경관도 가슴에 담고 와야 하는데 비를 맞으며 당일치기로 강행군을 했으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우의를 등산복 바지 위에 덧입고는 종일 걸었으니 땀에 절어서 다리 사이가 헐어서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승객들이 오기 전이라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장애인 화장실을 독차지하고는 냉수마찰을 한 후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여행을 즐겨 다니는 나는, 항상 그 지역의 특산물을 맛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날따라 풍경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 특산물도 맛보지 못했으니 고생만 한 추자도 올레길이다. 인생길도 이와 같을 터.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으며 궂은날이 있으면 화창한 날도 있을 것이다. 음식 메뉴도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생각이 다 다른 것이다. 그날 악천후 속에서의 추자도 올레길을 마감하며 앞으로 내 인생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리라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돌아왔다.

 

황경한의 묘

 

 그나마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추자도 올레길을 가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황경한'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추자도 올레의 백미(白眉)는 '황경한의 눈물의 샘'이었다.

 '황경한은 조선 순조때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 시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과 정난주(마리아) 사이에 태어났다. 황사영은 1790년 약관 16세 나이로 사마시에 진사로 급제한 인재로서 당시 명문가인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였고 신유사옥 때 천주교의 핵심 주모자로 지목되어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 사람들이 오가는 저잣거리에서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를 저지른 중죄인으로 처참하게 순교하였다.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 대정현의 관노로 유배되어 당시 2살이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유배되어 강진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가더 중 추자도 관리에게 아들은 인계하면 죽임을 당하리라 믿어 뱃사람과 호송관리를 꾀어 아들의 이름과 내력을 적은 헝겊을 아기의 옷에 붙여 추자도 예초리 해안가 바위에 내리고 하늘이 보살펴 주기를 바랬다. 다행히 소를 방목하던 하추자도 예초리 주민인 오 씨 부인이 울고 있는 아이를 거두어 성장시켜 황 씨가 없던 추자도에서 창원 황 씨 입도(入島) 조가 된다.

 정난주는 제주에서 관노로 37년간 길고긴 인욕(忍辱)의 세월을 살면서 아들을 그리워하다 1838년 2월 28일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하늘나라로 소천했으며, 아들은 자신의 내력을 알고 난 후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제주도에서 고깃배가 들어오면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전해진다.'

 이 곳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이 애끓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리는 황경한의 눈물로써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늘 흐르고 있다. 

 세월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감동적이고, 애틋한 사연을 새롭게 열리는 추자 올레길과 함께 단장하여 지나가는 길손에게 잔잔한 감흥을 불어넣고 있다.

 또한 추자도에서는 황경한을 거두어 기른 사람이 오씨 부인이기 때문에 황씨와 오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출처 :  추자도 올레길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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