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날의 단상(斷想)
김봉은
봄비가 창문을 적시고 있는 아침이다. 유튜브에서 비 오는 날에 딱 들어맞는 노래 한 곡을 지인에게 카톡으로 보낸다.
“색시 비가 내리는 아침에 딱 어울리는 음악”이라며 답신을 보내왔다. 비가 새색시처럼 내리고 있다는 단어를 처음 접하지만 예쁘고 정감이 간다. 빗줄기가 거세지 않고 새색시처럼 수줍은 듯 소리 없이 내린다는 뜻인가 보다.
햇빛이 쨍쨍한 날보다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감성에 젖기 쉽다. 오늘처럼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베란다로 나가서 창문을 열고 우리 앞에 버티고 선 장골산을 바라본다. 중턱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며 내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았다. 이 나이 되도록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얼굴은 희미해져 가지만 이름은 뚜렷하게 기억하는 후배들.
그들과 주고받던 대화나 다찌집과 카페 주점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가 활동사진처럼 펼쳐진다. 내가 그들 이름을 기억하고 가끔 떠올려 보듯이 그들도 혹 영혼이라도 있어서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긴 줄 안다. 하지만 그들도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들을 짝사랑하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다.
내가 아끼던 이들 몇몇이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했다. 평소 건강관리를 잘못한 사람도 있지만, 불의의 사고로 떠나간 사람도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거나, 인공 호흡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 않나 싶다.
1993년경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스쿠버다이버 동아리 모임을 했었다. 나는 격일제 근무부서에서 일했기 때문에 휴무일에는 보트를 타고 1시간여를 달려서 욕지 근해로 갔다. 보트 안에서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고는 스쿠버다이버를 즐겼다.
스쿠버다이버는 안전사고를 대비해서 짝 다이버(2人 1條)가 기본이다. 둘이 짝을 이뤄 잠수해야 한다. 다이버 강사로부터 기초교육을 받을 당시 만일 수중에서 한 사람이 산소가 떨어지거나 기기고장을 대비해서 수중 10m에서 둘이 함께 마우스 1개로 번갈아 가며 호흡하는 과정도 배웠다. 계기판을 수시로 확인하여 산소 잔량을 확인하고 여유 있게 부상(浮上)해야 한다. 그런데 초보 다이버인 후배가 수심 40여 미터에서 단독 잠수를 하다가 탱크에 산소가 고갈되어 폐부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또 한 후배는 카드놀이 중 볶음밥을 시켜 먹었는데 급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일행들은 게임에 몰입되어 그런 위중한 상태를 몰랐던 것이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 둘을 잃는 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들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몇 날을 폭음하고 울부짖었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해거름이 내릴 즈음이면 전화로 ‘형님 퇴근 시간인데 다찌나 한잔합시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눈가에 굵은 이슬이 맺힌다. 이제 나는 그들을 놓아주려 한다. 영원한 안식을 빈다. 대지를 적시는 봄비가 나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오늘따라 야속한 봄비다.
※색시비 : 새색시처럼 수줍은 듯 소리 없이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이슬비’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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