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주년을 구례 화엄사에서
김봉은
한 달포 전에 집사람이 넌지시 2월 20일이 결혼 40주년인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며 제안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여태껏 여행을 가본 일도 없었고 어디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집사람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여고 시절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의 딸과 친구였는데, 친구 엄마가 소현이는 가정 형편상 대학을 못 가니 어울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한다. 그 후 가슴앓이로 살아왔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녀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결혼 후 양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로 입학하여 졸업 후 사회복지사로 활동해 왔다. 최근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시행하는 아이 돌봄 지원사업인 유아 돌보미로 주 6일을 근무한다.
나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대부분 수사 분야에서 근무했다. 퇴직 전10여 년을 관내에서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휴일과 상관없이 1시간 이내에 현장에 임해야 하는 초급 경찰 수사간부로 생활하였기에 부부가 여행할 경제적이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퇴직 후 처음으로 가족 여행으로 4박 5일간 괌 여행을 한번 다녀오긴 했다. 이번 결혼 기념 여행은 부부의 첫 여행으로 휴일인 19일에 떠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나는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 아내는 오전 내내 바빴다.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36살 노총각인 아들은 독립해 살고 있는데 빨랫감을 잔뜩 갖고 왔다. 아내는 세탁기를 돌리고 일주일 동안 밀린 집 안 정리를 하느라 정오가 되어서야 출발했다.
떠나기 전 인터넷으로 여러 곳을 검색해 보았다. 돌아올 시간까지 염두에 두면 멀리 가지 못할 것 같아 남해 보리암과 각황전이 있는 구례 화엄사를 생각했다. 둘 중에 선택하라고 했더니 화엄사로 가자고 한다. 내가 이 두 곳을 선택한 이유를 집사람은 잘 모르리라. 남해 보리암은 산꼭대기에 있지만, 셔틀버스로 올라가고, 화엄사는 평지에 있기 때문이다.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1시간 30분을 달려서 화엄사 입구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들었다. '송이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으로는 늦은 시간이지만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이 지역에서 명성을 얻는 식당 같았다. 메뉴판에 돌솥밥이 눈에 들어왔다. 집사람과 같이 나온 여행길이니 그래도 제법 모양새 나는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나. 1인분에 19,000원짜리 돌솥 정식을 주문했다.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식당에서 파는 '고택 찹쌀생주' 를 한 병 사서 가방에 넣었다. 입은 술을 달라고 야단법석인데 운전대를 계속 잡아야 하니 감성을 이성이 눌린 것이다. 집사람은 반찬 가짓수가 많은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한 번씩 새터 시래깃국 집에 갈 때면 반찬 가짓수가 제일 많은 '훈이 시래깃국‘ 집으로 간다. 주말에는 객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줄을 서기 때문에 나는 별 좋아하지 않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아내의 비위를 맞췄다는 자부심이 꿈틀거린다. 그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오늘도 점수를 땄으리라.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 문화재 관람 입장료를 내고 통과했다. 평일이다 보니 화엄사 경내로 승용차 입장이 가능했다. 경내 주차장에 주차하고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 불상으로 모신 절의 중심 법당이지만 화엄사 대웅전 법당에는 나무부처인 삼신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년(1636)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황전(覺皇殿)을 마주했다. 각황전 건물 신화를 유심히 읽은 터라 감회가 새로웠다.
각황전을 건축한 목수는 열아홉 나이에 불사에 참여했는데 각황전을 다 짓고 났을 때는 일흔아홉이 되어 있었다 한다. 실로 60년 만의 완공이다. 그는 완공이 되자 머리에 동여맨 수건을 풀고 개울로 가서 한나절이 넘도록 몸을 씻었고, 그날 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세상을 떠자 어둠에 묻혀 있던 경내가 갑자기 휘황한 빛으로 밝아졌다. 밖으로 나와 보니 한 마리의 백학이 현란한 빛을 뿜으며 각황전 위를 너울너울 세 번 돌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각황전이 어찌 인간의 솜씨로만 건축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어찌 60년의 세월을 견디고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인가. 뜨거운 불심으로 마침내 시공계(時空界)를 초월하는 경지에 든 그는 부처님의 가호 없이는 해내지 못했으리라. 깊은 사연을 아내에게 들려주니 역시 감탄했다.
각황전(국보 제67호)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계파 대사가 중건한 증층의 대불전이다.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하였다. 1703년에는 삼존불, 사보 살상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대법회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 하자 조정에서는 각황전이라고 사액하였다. 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하였다.
화엄사 각황전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각황전의 ’각황‘은 부처님이 깨달은 왕(성인 중의 성인)이라는 뜻과 숙종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각황전 앞 홍매화 나무를 감상했다, 붉은 꽃망울이 이제 막 몽실몽실 맺기 시작했는데 올해 홍매화는 3월 20일경 만개할 것이라고 한다.
이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계파 선사께서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홍매화를 심었다고 한다. 일명 장육매(丈六梅)라고 하며, 또는 각황매(覺皇梅), 각황전 삼존불(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다보불)을 표기하여 삼불목(三佛木)이라 불린다. 홍매화의 붉은 꽃 빛은 시주할 돈이 없어 애태우며 간절한 헌신 공양한 노파의 마음이며, 환생한 공주의 마음인가. 언제나 위태로운 왕자를 보며 애태운 숙빈최씨의 마음이런가. 홍매화는 그들의 애끓고 마음의 빛깔처럼 붉고 또 붉었다. 홍매 불자는 향긋한 향기를 불보살님 전에 올리고 아름다운 자태를 참배객에게 보여주어 환호심을 불러일으킨다고 ‘각황전 앞 홍매화 안내문’에 적혀있었다.
대웅전 지붕 사이로 올려다본 노고단에는 아직도 지난 겨울 내린 눈이 덮여있었다. 공양간 옆 도랑 건너 저 언덕배기 길은 10여 년 전 내가 2박 3일간 화대 종주(화엄사~대원사)를 하러 올라갔던 길이다. 젊은이 하나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나였다.
돌아오는 길에 화개장터에 들렀다. 결혼 40주년 짧은 여행을 마치고 저녁 식사는 화개장터에서 사 온 버섯과 이마트에서 산 부챗살을 굽고 구례 송이식당에서 사 온 '고택 찹쌀생주'로 축배를 들었다. 서로의 직장생활 때문에 어긋나서 즐기지 못한 인생을 앞으로는 아낌없이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약속하는 의미였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내년부터는 꼭 결혼기념일을 챙겨서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떠나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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