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1주년 기념여행 남해
김봉은


결혼 41주년 여행지를 물었다 집사람에게 어디를 가면 좋겠느냐고.
이틀뒤에 답이 돌아왔다.
남해에서 사위 박서방 모친이 미술 전시회를 하고 있는데, 박서방 가족들이랑 같은 차를 타고 가서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한국음식명인 반건조 우레기(우럭) 한정식 전문 '남해몽돌집 1995'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까운 독일마을을 구경하고 오기로 했다.
찾아간 남해군 삼동면 봉화리 내산저수지 옆 '바람흔적미술관'에 정순영 작가의 '주변이야기'가 펼쳐져 있었다.
"주변 周邊 ··· 내 사유 思惟의 출발점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나와 내 작의 作意가 결합하는 초 주관적 공간이다. 여기에서 길어 올린 몰입적 경험을 통해 시공간으로 연결된 삼라만상의 연속성 위에 '삶의 주변', 즉 나의 작품세계를 세웠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초래되는 필면적 자아의 진보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산실이었다.
화석화가 된 관념觀念과 의념疑念이 새로운 세계를 수용하는데 거대한 장애물로 작용했다.
캔버스를 마주할 때마다 직면하는 고통과 그것을 등졌을 때의 좌절은 결국 오랜 침묵과 단절을 연소시키는 역설적 동력원이었다.
작가는 붓을 짚고 일어선다.
순백의 캔버스에 나이프를 긋고 작가의 나이테를 새겨나간다.
순수의 색을 입은 하늘
관념의 색을 벗은 바다
빛바랜 추억이 속삭이는 언어
빛을 담아 공간을 채우고 색을 찍어 면을 채운다. 주변의 빛은 까마득히 먼 과거에서 날아오지만, 색은 오늘의 현상, 작가는 그 빛과 색을 찍어 내일을 완성하는 고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은 어느 한 지점의 이야기이면서 모든 것의 뿌리이기도 하다.
정순영 작가노트 중에서".
정순영 작가는 2021년 제40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한 경력 작가다.
내산저수지에 담긴 물을 휘감고는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음력 정월 스무 닷새 날 바람은 너무 차갑고 거셌다. 미술관 이름마저 '바람흔적미술관'이었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특히 서양화는 더더욱 이해가 힘든 나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세상의 이야기였다.
전시된 작품 중에 단 한점, 짙은 블루의 바다 위에 검은색으로 표현한 섬! 그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어디서 본듯한 풍경이다. 그래 유배 문학의 섬 노도다. 잠시 그때의 추억을 소환했다.
2016년 6월 정년퇴직한 후 지리산둘레길 21구간 전 구간을 걸었고, 이어서 사천의 이순신바닷길에 이어 2017년도 8월부터 남해의 어머니들이 조개, 파래 등 해산물을 채취하여 가족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바다로 향했던 길인 '바래길'을 탐방하면서, 그 두 번째 코스 앵강다숲길 앵강만에서 문득 바라본 섬 노도! 문학의 섬을 연상케 했다. 조선시대 숙종 때 서포 김만중이 유배를 와서 3년간 살면서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썼는데 유배 문학의 섬 노도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정작 작가는 '주변이야기'라고 표제가 붙어 있었는데 어떤 주변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서포 김만중의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보면,
어려서 어머니의 정성과 김만중 본인의 노력으로 1665년에 과거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고.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시찰했고 1672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비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 맛을 보게 된다.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687년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로 유배되었다. 어머니 윤 씨는 아들을 걱정하다가 사망했으며, 김만중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채 1692년 유배지인 남해에서 끝내 사망했다.
'사씨남정기'는,
조선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한글 소설. 유연수가 첩 교 씨의 모함에 속아 착하고 현명한 본처 사 씨를 내쳤으나, 끝내 교 씨의 음모가 발각되어 그녀는 처형을 당하고 유연수는 다시 사 씨를 맞이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의 가정 소설이다. 숙종이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고 장희빈(張嬉嬪)을 왕비로 맞아들인 것을 풍자한 것으로, 흐트러진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고자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을 숙종이 읽다가 책을 던져버렸다는 후일담도 있다.
미술관 참관을 마치고 미리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물색해 둔 같은 면 물건리 은점 어촌체험마을에 있는 한국음식명인 '남해몽돌집 1995'로 갔는데 식당 앞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니 카톡으로 대기 순번을 받아 선창가 몽돌밭에서 산책을 했다. 이곳 바람도 만만찮았다. 바다 건너에는 통영의 사량도와 추도, 두미도, 욕지도 눈앞에 떠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남해에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통영에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남해 삼동면과 통영의 섬들이 지척에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인근 독일마을로 이동을 했다. 이곳은 우리나라가 너무나 가난했던 1960~1970년도 가족 부양을 위해 머나먼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로 떠났던 젊은이들이 조국의 경제발전에 초석이 된 당신들의 땀과 눈물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역사로 파독 광부 열네 명 과 간호사 서른한 명의 정착 1세대들이 정부 지원으로 2015년 7월 16일 '독일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준공된 곳이다.
나는 이전 바래길 탐방 때 전시관에 들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위해 미국에 차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당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동서독이 분리 대치중인 동병상련의 입장에 있었지만 경제대국이었던 서독을 방문하여 당시 서독인이 기피하는 직업인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얻어 왔다는 동영상을 시청하였기에 손자들에게도 꼭 참관시키고 싶어 찾았으나, 아쉽게도 '파독전시관'은 리모델링 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남해독일마을에 접속해서 2014년 6월 28일 개관된 파독전시관에서 자료 열람으로 대신했다.
"파독전시관은,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머나먼 독일로 건너가야 했던 경제 역군들의 삶과 애환, 역사를 널리 전하고자 건립되었습니다.
이어서 1960년대 조국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던 파독근로자들의 생생했던 현장과 어려움 속에서도 잊지 않았던 고국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지하 800~1200미터 암흑 속 탄광이 재현되어 있고, '글뤽아우프'(살아서 돌아오라)를 외치며 힘겨운 노동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파독광부들의 생생했던 삶의 현장을 지나면 파독 간호사들의 치열했던 병원 생활을 만나볼 수 있는데, 낯선 서양 문화, 언어의 벽을 넘어 환자를 간호해야 했으며, 그들은 '코리아 엔젤'이라 칭송받으며 주어진 의무를 묵묵히 수행했던 그분들의 숨겨진 눈물겨운 애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독일마을 주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전시관을 나와서 독일마을 슈퍼로 들어가서 나는 단츠카 보드카 한 병을 구매했고,
규민이가 진열대에 붙어 서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곳에 가보니 머리핀이었는데 두 개를 골랐다. 독일인이 수공예로 만든 것이라고 하여 구매했다.
집사람은 독일 빵과 코코아쿠키를 구매해서 들고 나왔다. 남해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외출에서 돌아오니 유배 문학의 섬 '노도'가 뽁뽁이 포장지에 포장된 채로 내 방에 와 있었다. 딸이 다녀간 모양이라고 추측하고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전시장을 방문했을 당시 같은 공간에서 손 작가라는 분이 설명을 열심히 해 주셨는데 그분이 내가 유독 그 그림 앞에 오래 머물렀다며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고 정순영 작가에게 전달되어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그 가제 '노도'를 보내온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별로 주변에 베풀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이번에 마음에 등짐을 하나 더 보탰다. 남은 생生 살면서 부지런히 쌓인 등짐을 덜어내는데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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