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6.02.02(월) 새풍화식당

버팀목2 2026. 2. 3. 06:41

2026.02.02(월) 눈 찔끔




          
[ 오늘의 묵상 ]

2월의 새로운 한 주 첫
월요일을 맞이합니다

하얀 눈이 온 천지를
하얗게 하얗게 색칠을
해놓았네요

가지마다 눈꽃이 펼쳐진
새벽녘 설경의 모습들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네요 장관입니다!

이제 1월이 지나
2월은 다가올 새봄을
시샘하여 꽃샘추위가

심술을 부리는  "시샘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산책로길을 무겁게 덮고
있는 차가운 공기도 이제

변화의 바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네요

그 바람이
머지않아 봄바람으로..

시간도 가고 날도 가고
달도 가고 계절도 바뀌고

해도 바뀌는 대 자연의
섭리를 사랑하고 존중
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네 가는 인생길도
늘 건강하고 행복의 문을

천천히 다 함께 손잡고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가 더욱
소중한 짧은 2월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웃음꽃이 멈추지 않는

행복이 넘치시는 축복이
가정마다 이루어 지시길
소망합니다

엊그제 까지 웃고 즐기던
다정한 벗이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합니다

건강관리 잘하시어
늘 좋은 건강 유지하시길
기원합니다

건강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 아래글은 잔잔한
깨달음을 안겨주는 맛이 있어 다시 소개드립니다

가슴속 배냇저고리~(사랑)
 신부 서품을 받아한 성당의 사제가 되기 위해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비단 보자기로 싼 작은 상자를 내밉니다.
무엇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조용한 시간에 풀어보라고 이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한참을 잊고 지내온 신부는 사제관 한쪽에 놓아둔 상자를 꺼내 보자기를 풀었습니다.
상자 안엔 누렇게 바랜 아주 작은 배내옷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속에 어머니 편지가 곱게 접혀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가 있더라도 늘 기억하라는 어머니의 기도입니다.

“예전엔 나도 한없이 어리고 작았다는 마음으로, 언제나 낮은 신부님이 되세요.
어미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라는 글입니다.
 
편지를 읽던 신부님의 가슴도 뜨거워졌겠지만,
배냇저고리라는 말에 내 가슴도 뭉클했습니다.

한없이 여리고 연약한 나를 감싸주었던, 세상에 태어나 처음 입은 어머니가 지어준 옷.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어머니의 사랑의 언어가 숨어 있습니까?
겸손해라. 온유해라. 사랑하고 섬겨라. 그때를 기억하라. 모든 언어가 하나가 되어 가리키는 곳은 ‘낮은 곳’이었습니다.

배내옷에는 세상의 어떤 선물과도 견줄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제가 되어 광야로 떠나는 아들에게 사랑의 가늠자 하나를 선물한 것입니다.

뜨거움, 기쁨, 환희, 눈부심,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사연을 마주한 지가 언제인가?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모든 걸 외면하고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뒤만 보며 사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누구 같이’ 살고 싶다던 그 많은 멘토들, 롤모델은 어디로 다 보내고 툇마루에 드리우는 저녁 그림자를 쓸쓸하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나도 가슴속 어딘가에 어머니가 지어 주신 배냇저고리의 흔적이라도 남았으면 좋을 것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15년을 기념하는 날에 그러한 갈증을 느낍니다.
추기경은 어머니 기도대로 일생을 배내옷을 품고 산 분입니다.

47세에 한국 최초,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된 후 일생을 스스로 바보라 칭하면서, 늘 넉넉한 품으로 핍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품어주고, 사회를 향해 묵직한 소리를 내던 분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긍정의 마음을 심어준 분입니다.
1951년 처음 사제복을 입을 때 선택한 성구는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였고, 세상에 남기고 간 인사는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였습니다.

한국교회사 연구소가 펴낸 ‘김수환 추기경’에는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된 후 미리 쓴 유서가 있습니다.
1971년 2월 21일 밤이라고 밝힌 사무용지 한 장에 또박또박 써 나간 유서엔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깊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모든 불우한 사람들 속에 저는 있지 못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의 부족한 사랑을 용서해 주십시오.”
 열정으로 가득한 마흔아홉 나이에, 유서부터 준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생을 통한 추기경의 고백이고,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가슴에 품은 빛바랜 배내옷의 가르침 대로.
추기경은 잘못된 정치에도 묵직한 매시지를 날렸습니다.
정권의 수배를 받은 학생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명동성당 앞에서 경찰에게 말합니다.

“나를 넘고 지나가라. 그러면 뒤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또 넘어가면 뒤엔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준엄하게 불의를 꾸짖는 어른이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TV를 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 세상에!” “추기경님이 어떻게!” TV 속에서 대중가요 ‘사랑의 미로’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놀라면서도 입은 웃었습니다.

추기경의 소박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남자라는 소탈한 모습에 마음 뭉클함을 느끼면서. 추기경은 종교의 편 가르기를 경계했습니다.
구원이라는 명제 앞에 종교는 서로가 경계할 대상이 아니라 했습니다.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열린 음악회에 법정 스님과 나란히 앉아 화합의 아름다움을 보였습니다.
촛불, 반미시위 등을 둘러싸고 일부 급진파 종교인이 공격을 받던 2004년 때입니다.
추기경은 자신의 색깔을 묻는 질문에 “굳이 말하면 바꿔가는 보수(補修)”라고 뼈 있는 유머로 답했지요.
 
이태 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깜짝 선언도 합니다.
“나도 출마합니다. 기호는 1번이고, 지역구는 전국구입니다.”
바보 추기경의 유머는 늘 잔잔한 깨달음을 동반했습니다.
거칠고 서걱대는 삭막한 세상에서 낮은 자리를 찾아다닌 김수환 추기경.

‘내 탓입니다’를 선창해 사람들마다 자동차 뒷 유리에 스티커를 달게 한 그분의 따뜻한 리더십이 선연합니다.
 아픔 있는 자에게는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위로하고, 젊은이에겐 “가끔은 칠흑 같은 어두운 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라”라고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고단한 삶으로 방황하며 길을 묻는 자에게는,
인간의 길이란 어떻게 하면 ‘내면적으로 풍요롭게’ 사느냐에 있습니다.”라며  다독였지요.

감사합니다.





아침에 현종이네 집에 도착하여 거실에서 김승봉 시조시인의 시조집 '라바콘 주의보'를 펼치는데 집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집에서 출발할 당시 하늘을 보더니 눈 오는 날씨 같다고 하기에 어제 카카오스토리에서 지난날 오늘 있었던 추억이 떴는데 2019년 2월 1일 자 어제 통영지역에 함박눈이 몇 년 만에 내렸는데 뒷날인 2월 1일 미륵산에 올라 설경에 흠뻑 취했노라고 말을 하면서 통영에 눈 온 지 7년이나 지났다고 했었다.
현종이와 규민이를 창가로 눈 오는 구경 하자고 같이 나갔는데 눈이 맞긴 맞는데 쌓일 눈이 아니고 그것도 찔끔 뿌리다가 그쳤다.
여하튼 첫눈 오는 형세는 본 턱이다.

낮에는 어제 낮에 끓여 먹고 남은 떡국이 냄비에 국물이 말라붙은 채 있기에 뜨거운 물을 한 컵(240ml) 붓고는 끓였더니 싱거웠다.
대처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통고 매점에 근무 중인 집사라에게 전화를 했더니 뒤베란다 문 앞에 있는 1.8L 간장병이 있으니 적당량을 가미하라는 것이었다.
김가루 넣고 볶아놓은 깨소금을 꺼냈는데 볶아놓은 것인지 냄새와 색깔로 구별이 되지 않아 절구통에 넣고 공이로 분쇄를 하니까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저녁 무렵 집사람한테서 전회가 와서 코아루 아파트 유아돌보미 알바가 일찍 종료되어 귀가 중인데 장어탕 생각난다며 먹으러 가자고 해서 새 풍화 식당에 갔다.
가면서 생각이 그 집 아들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언뜻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빈봉투를 하나 준비를 해서 갔었다.
지난 아들 동완이 결혼식 때 축의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식당 안주인 장민수 여사에게 혼사에 대해 물었더니 다가오는 3월 1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청첩장 나왔으면 달라고 했더니 청첩장에 당연히 기재되어 있어야 할 축의금 계좌번호가 없었다. 대신 바코드가 찍혀 있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바코드를 찍었더니 로또 당첨여부 확인 할 때처럼 거기 웨딩 사진부터 축의금 계좌 등이 몽땅 들어 있었다.
청첩장도 시대에 따라 이렇게 변신했구나를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