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때기(절간고구마) 추억
김봉은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 지인으로부터 10kg짜리 고구마 두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집사람이 한 번 삶았는데 맛이 없다면서 베란다에 방치된 지 두 달째다. 어쩌다 눈길이 가서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반쯤은 썩어가고 있고 반쯤은 싹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도 생산지가 황토밭이 아니라 습지에서 캤는지 흙투성이였다. 이대로 두면 얼마 안 가서 생활쓰레기봉투에 담겨서 아파트 쓰레기 집하장행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농촌에서 자란 나는 그걸 묵과하지 못하는 성미다. 어릴 때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터라 부엌 앞 배수구에 밥알이 한 톨이라도 눈에 띈 적이 없는 우리 집 가훈 같은 실천 덕목이었다.
상자채로 싱크대 앞으로 들고 와서 우선 세척부터 했다. 삼분지 일은 부패해서 버리고, 삼분지 일은 반반이라서 칼로 잘라서 반은 버리고 반은 남겼다. 세척한 고구마 양은 그래도 부부가 며칠 내로 먹어치우기에는 과도한 량이었다. 그래서 빼때기 (절간고구마)로 변신시키기로 했다. 부엌칼과 도마를 준비해서 신문지를 넓게 펴고 그 위에서 고구마를 잘랐다. 내 어릴 때 체험했던 빼때기 썰기 작업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안방 윗목에서 밤새껏 부엌칼이나 작두로 빼때기를 자르다가 그만 깜박 졸음에 손가락을 자른 마을 어머니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다음으로 개발된 것이 절간고구마 전용 기계였다. 밭에서 천막을 펼치거나 인근 산소 잔디밭, 심지어 스레트 지붕 위에도 빼때기를 널었는데 밭에서 캔 고구마를 소쿠리에 담아 나르고 한 사람은 연신 기계를 돌려서 대량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래 고구마는 첫서리가 내릴 즈음인 시월 중순에 캐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이 당일 수매 가마니에 담겨 생고구마로 주정공장에 팔려 나갔다. 그런데 그 고구마를 절간을 해서 팔면 손이 더 들어간 만큼 수익을 더 올릴 수 있었다. 벼농사와 수확시기가 겹치기도 했는데 나락은 대부분 아침 햇살이 비칠 때 꺼내서 말렸다가 오후에 거둬들이지만 빼때기는 물기가 많아 며칠 동안 뒤집기를 반복하면서 노상에 그대로 있는데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고, 일기예보도 하늘에 구름과 바람 방향에 따라 예측하던 때라 한 밤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빗소리를 듣고서야 잠에서 깨어 까꾸리, 대나무 빗자루 등을 챙겨 온 식구들이 빼때기 걷어 들이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러고 나면 빼때기에 곰팡이가 썰어 수매 시 등급이하로 판정을 받아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수매로 팔려 나가는 고구마나 빼때기는 주정공장 가공과정에 세척을 하기 때문에 흙이 묻은 채로 가마니나 포대에 담지만, 집에서 식량 대용으로 먹을 고구마와 내년 씨종자로 사용할 것은 흙이 묻은 채로 안방 윗목에 자리를 잡았고, 빼때기는 고구마를 절구통에서 깨끗하게 세척을 하여 절단한 후 집안에서 멍석을 깔아 건조한다. 판매용과 내수용은 애당초 대우부터 틀린다. 그렇게 건조해서 아랫채 사랑방에 보관해 둔 것으로 달리 겨울철에 군것질 꺼리가 없는 터에 빼때기는 유일한 식구들의 간식거리였다. 빼때기 죽은 끊일 때 한번 끊었을 때 조리를 사용하여 빼때기 건더기를 반쯤 건져서 물기를 뺀 다음 간식으로 먹고, 나머지는 건더기를 주걱으로 으깨어 죽을 끊여 밥 대신 끼니를 때웠다.
어린이들은 설빔으로 사준 검정색 교복 상의 아랫주머니에 넣고 동무들과 마을 뒷동산에서 편을 갈라 진돌이나 술래잡기놀이를 할라치면 날쌔게 뛰어다니기 때문에 빼때기가 상의 양쪽 호주머니를 맞창을 뚫어 돌아다닌다. 어울려 논다고 어머니로부터 불호령 같은 꾸중은 뒷전이다. 해질 무렵 온 동네 밥 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멈춰지면 어머니나 형수들이 아이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여 호명하는 목소리가 골목을 넘쳐날 때쯤 걱정이 태산처럼 몰려온 얼굴로 슬그머니 집안으로 스며 들어가곤 했었다.
선물 받아 아파트 앞 베란다에서 천대받던 고구마가 빼때기로 변신하면서 내 어릴적 한 시대가 스크린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 처연했지만 남은 내 인생 갈무리 잘해서 잘 살았다고 위로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