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5.04.07(월) 멸치조림,상추쌈, 18:30 참살이보리밥집 통영사랑산악회 월례회,이영도 지리산등반기

버팀목2 2025. 4. 7. 11:29

2025.04.07(월) 맑음







☆   얼레지의 봄 날은 간다

저기
지나가는 여자를 놓고 허리 상학이 발달한 여자
허리 하학이 발달한 여자, 운운하며
사내 몇몇이 나른한 봄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렇게라도 시시덕 거리지 않으면
봄날은 못 견딜 일인지 저 그림자를 지우며
멀어져 가는 벚나무 아래서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제 안에 다 품고 있는 듯한
꽃, 엘레지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꽃이 피면서 여자 치마 뒤집 어지 듯
뒤집어진다고 꽃말까지 바람난 여인이라니!

이유 있는 반란이라면 서슴지 않는
요즘 꽃들이 제 아무리 화끈하다 하여도
바람은 아무나 나나, 얼레지는 피어나는데

무엇 그리 두려워 가시를 드러내며
살고 있는지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요염함을
한껏 꽃대로 밀어 올리며 살아도 좋을
봄날이 속절없이 가고 있었습니다

☆* 시 전 집 *  중에서 / 이    정    자     글


♤       에       필      로      그

바람난 여인은 요염한 자태로 유혹을 하네
얼레 얼레 얼레지
얼굴 벌게진 남정네 다급한 노래로 말을 더듬네 아가 아가 아가씨

선혈이 낭자한 자줏빛 사랑은
절벽 바위틈에도 숨이 넘어가도록 비명이다

☆ 얼레지   /  공    석    진

☆* 시 전 집 *  중에서

☆ P * S

° 얼레지 꽃 °   꽃  말

꽃잎이 말려 올라가는 모양새가
여인이 치마를 들어 올린 것 같다 하여
* 바람난 여인 *이라는 재미난 꽃말을 지니고 있음  ♡



 아침에 강여사가 멸치조림과 상추를 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아침에는 상추쌈을 잘 먹지 않았는데 먹어보니 먹을만 했다.

저녁에는 참살이 보리밥집에서 통영사랑산악회 월례회가 있었는데 술멤버 O씨가 불참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암이 발병하여 서울로 갔다고 한다. 마음이 아프다. 

 

 

 

 

1956년 시조 시인 이영도의 지리산등반기
 

지리산 등반기(智異山登攀記)
 
 
작가 이영도(호: 정운丁云,1916~1976)
경상북도 청도출생.1945년 대구의 문예지동인지 "竹筍"에 시 "除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통영 중, 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거쳐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 시조시집 "청저집(靑苧集.1954)". "석류1968"가 있고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 "비둘기내리는 뜨락(1966)". "머나먼 사념의 길목(1971)" 등이 있다.


 
<등 반>
산록(山麓)에서 밤을 쉬고 산을 오른다.
저마다 중무장(중무장)을 갖추고 체중보다 무거운 배랑을 메고 바야흐로 거악(巨岳)을 정복한다는 자부와 용맹에서 일행은 자못 긴장한 표정들이다.
산록에서 한시간 가량 올라가니 장엄한 계곡이 펼치는데 속진을 가실 듯 한 맑은 물소리!
여기가 두류산양단수(頭流山 兩端水)라 한다.
일찍 처사 조식(曺植)이 읊은 시조가 생각나 저만치 상류 어디메 복사꽃이 구름 같이 피어나는 무릉(武陵)이 보이는 듯 눈에 선해진다.
여기서부터 차츰 산길은 준엄해 지고 표고 팔백메타 지점에 표지처럼 우뚝 선 “칼바위”를 지나고 부터는 짙은 숲,강파로운 낭떠러지며, 청석위를 더듬어 기어 올라야하는 완전 쟝글 지대가 연속하는 것이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바위 밑에 피하고 부슬비는 그냥 맞으며 키보다 높이 욱은 속새밭을 헤쳐가며 골짝을 넘는 것은 오직 산을 넘어야 한다는 일념 뿐 자연의 탐승이 아니라, 자연과 대결하는 하나의 인간 투쟁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문창대(文昌臺)
산 중턱 높다랗게 솟은 '망바위'옆을 비스덩히 내려다보는 곳에 예날 최고운(崔孤雲)선생이 살았더라는 문창대가 섯다.
천하의 강산을 편답하다가 이렇게 수석좋은 자리마다 암자를 짓고 깊히 자연과 더불어 사색한 고운선생의 높은 인격과 크낙한 이상을 가슴에 측량하며 바위에 올라보니 멀리 남쪽으로 대령한 첩첩 연만(連巒)이 아슴히 보라빛으로 구름위에 떠 오르고 안개에 덮인 골은 망망한 바다같애 무언지 눈물 겨웁도록 마음 어질어지려 하는 것이다.

 
법계사지(法界寺趾)
표고 천삼백메타 고지에 있는 신라 고찰로서 몇번의 중수를 거듭 했다는데도 이제는 허물어진 빈 터에 삼층 석탑만이 자연석 위에 초연히 섯을 뿐,
절터는 잡초 욱어져 보이지 않는다.적적히 골깊은 여기를 찾아 들어 바위른 쪼아 탑을새긴 인정의 그깊은 비원(悲願)이 때 아침 비껴드는 노을빛을 받으며 돌끝에 서려 나의 말문을 막는것이다.

 
한가닥 열원(熱願)일네
뉘도 모른 사랑일네

물 구름 깊은 여기
神도 외면한 골짝

노을도 비껴 타거라
이 돌이여! 情이여!

천왕봉(天王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은 상봉에 다달으니 거센 비바람을 몰아와 지척 조차 분별 못할 짙은 안개는 천구백메타 고지를 채어 오른 가쁜 숨이 갈아 앉을 겨를도 없이 전신에 오한을 느끼게한다.
자욱히 운무에 싸인 천지를 배경하고  긴 가죽 도롱이들을 머리 위에서 부터 길게 걸쳐 내리우고 지팡이로 더듬으며 열을지어 걸어오고 있는 일행의 모양이 어느 고대 신화에 나오는 고행(苦行僧)들의 현현인 듯 가슴이 서늘해지며 절로 옷깃을 여미게한다.
영남의 군산을 발 아래 거느리고 웅장하게도 국토 남부를 지켜 선 이 지리 영봉을 나는 얼마나 사모해 왔는지 모른다.
영정에 올라 첩첩한 산악들의 구비마다 감도는 강하(江河)의 흐름과 그 너어 펼쳐있는 푸른 들녁과 에워 선 산록마다 따뜻하게 깃드려 숨 쉬는 어린 마을들의 애틋한 모습을 안개 사이로 굽어 보며 인생을 생각하고 예술을 생각하고 나의 목숨을 느껴볼 수 있는 이 시간을 나는 얼마나 계획해 왔는지 모르는 것이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세상살이 속에 얼어 붙은 내 흉금을 이 크고 그윽한 가슴에 기대어 고래 고래 고함을 치며 몸부림도 하고 어리광도 부리며 너그러운 어루만짐을 받아 보구 싶었던 것 이었던가?
그러나 너무도 알뜰한 사모였으매 오히려 말문도 막히는 애정처럼 얼굴을 가리우고 선 천왕봉은 종래 흐린 표정을 가셔주지 않을 뿐이다.

너의 사모는 정작
멀고 아득한 것!

항시 그 마음
말없이 여미우고

지긋이 아미(蛾眉)를 굽어
연만(連巒)위에 앉았다.


홈바위골 막(幕)
능선을 연한 고지는 운무에 싸여 우리 일행은 구름속을 헤어가는 유령들 처럼 공포와 신비속에 말을 잃었다.
암혈(巖穴)을 뚫고 나가면 울울한 원시림! 키 보다 높이 자란 속새밭!
욱을대로 욱은 가시덤불 사이로 길을 찾아 행진하는 동안 날이 어두워 오고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쏱아져서 천막 칠곳을 찾아 헤매기 몇시간을 지나 겨우 홈바윗골 목기막(木器幕)을 찾기 까지의 고생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통나무로 이리 저리 걸쳐서 벽을 모우고 속새를 엮어 지붕을 덮은 단칸짜리 움막 하나가  불시 조난을 당한 우리들에게는 항간의 고루거각보다 고마운 집이 아닐수 없다.산에서 나는 오리나무, 피나무. 노각나무 등으로 목기의 백골을 만들며 고독하게 살고있는 늙은이에게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이 막 하나가 그의 거처인 동시에 공장이다.
산간에 숨어살아 나무 열매나 따먹고 개울물을 마시고 자연생의 나무로 생업을 하는 늙은이는 한 해에 몇번 양식을 구하러 먼 재 넘어 산마을에 다녀올 뿐 세상사는 일체 아랑곳없어 그 흔해 빠진 선거도 투표도 가맣게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막사 곁에다 우리는 천막을 치고 젖은 나무를 모와다 휘발유를 뿌려불을 질러서 옷들을 말리고 밥을 지어 기한(飢寒)을 면하기에 천신 만고로 지리산의 첫 밤을 쉬기로 한다.

세석평전(細石坪田)
세석평전! 이름 그대로 잔 바위들이 널널히 흩어진 평전이다. 육.이오 동란전 까지만 하더라도 화전민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을뿐 잔디 사이로 호랑이 똥 토끼 똥을 볼수 있을 뿐이다.

세계골(대성골)
여기 세계골은 이번 둥란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수천명의 인민군이몰살을 당한 골짜기라 한다.
지금도 골을타고 내려가면 해골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며 인민군의 두목 이었던 이현상도 여기서 잡혔다 한다.
아닌게 아니라 나이 젊은 k군이 사람의 두골을 지팡이 끝에 꿰어 들고 앞장을 서는데는 정말 가슴속까지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나려다 보면 골은 깊어 수목은 자욱한데 솔바람소리 이따금 스쳐갈뿐 짐승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등성이에 눈을감고 서니 무수한 젊은 부르짖음이 아우성처럼 가슴에 밀고 든다.

 
분노에 부릅뜬 눈!
버둥거리는 팔과 다리!
얼마나 아까운 내 동족의 힘이요,생명이요, 청춘들이었던가?
공산정치 교육에 기계처럼 굳어버린 철없는 젊은 사상(思想)들이 오직 조국을 구하는 싸움이란 그릇된 신념에서 꽃 같이 져간 목숨의 골짜기다!
이 골짝 멀리 산록에 쌍계사(雙溪寺)가 있다 한다.

조석으로 울리는 인경 소리에 못다한 영혼들이 고이 제도 받기를 빌며 아쉬운 걸음으로 영(嶺)을 넘는다.
       

 
노정(路程)
쟝글을 지나면 강파로운 재요,재를 넘으면 또 원시림!
가도 가도 끝없이 엉클어진 딸깃골, 욱은 속새! 단풍골! 철쭉골!
욱을대로 욱고 엉킬대로 엉킨 산길을 헤쳐 가기에 얼굴은 핥키고 장갑은 헤지고 다리는 멍이 들고,금방 지척에서 호랑이가 내달아도 알길 없을 만큼 울창한 숲!
이 산을 스물 한번 째 오른다는 s선생도 길을 찿기에 헤맬만큼 어지러운 골들이다.
지리산은 웅장하면서도 밝은 산이다.

낮은 봉이나 높은 봉이나 능선에만 올라서면 전후 좌우가 일목요연하게 트인 지세다.
나무란 나무는 일체히 그 방향을 같이하여 가지를 뻗어섯고 이름도 모를 고산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낙락한 바위끝에 매달린 버섯들!
이 좋은 산에다 등산로를 닦고 푯대를 세우고 군데 군데 산막이라도 지어 저마다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될 날이 속히 와야 할것이다.

사냥
걷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데고 식수 있는 곳이면 거기다 천막을 치기로한다.
일행중 수렵(狩獵)의 명수인 k씨가 멧돼지와 노루를 사냥해 와서 자못 인기롭게 갈채를 받게되고 모두들 산 노루 목을따서 피를 받아 마시고는 하루의 피로가 풀렸다고 기세들을 올리는 것이다.
더러는 수풀을 베어 천막을 치고 한편에선 샘물을 치고 마른 나무둥치를 모와다 불을 지피고 해서 불꽃이 등천하는 둘레에 모여 낮에 잡은 노루와 멧돼지를 꾸워 먹는 모양은 어느 원시의 픙속도 처럼 구경 답기만 하다.
까다로운 형식과 문명의 이기(利器) 속에선 문화를 고창하던 사람들도 여기선 짐승의 목을 따 생피를 마시고 멧돼지를 통채로 잡아 나꾸는 약육강식의 동물생태 그대로다.

범왕골

덕평에서''칠불암''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불과 이십호 가량의 작은 촌락이다.
생업이라곤 주로 담배 재배요 집집이 삼(麻)를 널어 놓고 부녀들은 삼을 삼고들 있는데 산적떼처럼 내려 닥친 우리를  보고  슬금 슬금 어디론지 다 숨어 버리고 노인들이 겨우 묻는 말 댓구를 해 줄 뿐이다.
우리 의료반에서 뱀에 물린 농부 한 사람을 치료해 줌으로써 서로의 뜻이 알려지게 되어, 들으니 이 마을에서는 칠십리 밖에 있는 면사무소 근방에 가야 병원을 만날수 있기 때문에 급한 환자가 생기면 고스라니 죽기 마련이라 한다. 여기도 우리 국토일 바에야 국가에서 늘 이러한 산촌에 뜻 있는 의사들을 좋은 조건으로 파견시켜 백성의 생명을 보장하는 정책을 써야 할것이다.
나라에 동란이 일어 났을 땐 이 마을의 청년들도 끌려가 핫바지 저고리의 국민병이 되었다 하지 않는가?

찬샘골 야영(野營)
''칠불암'(七佛庵)''을 보기 위하여 높고 큰 재를 몇개나 넘었는데도 암자는 전화(戰禍)를 입어 자취도 없어지고 수천년 연륜을 감고 멋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은행나무 마저 도벌을 당했다는 소문을 ''범왕골''에서 듣고 우리는 사지(寺趾)를 십리밖 골짝에 둔 채 ''반야봉''쪽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코가 땅에 닿는 바람벽 같은 재를 오르기 이십리! "반야봉"을 멀리 팔키로 밖에 두고 날이 어두워 "찬샘골" 숲속에다 천막을 쳤다.

골 이름 그대로 샘물도 차거니와 기온이 팔월 인데도 초겨울 밤처럼 몸 속이에 떨려온다.
대보름 달집처럼 꽃불이 타는 둘레를 빙 둘러 집씨 떼처럼 천막을 치고 일행은 충천하는 불꽃을 애워 앉아 마치 피곤을 모르는 족속처럼 떠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박장대소, 천하의 상소리는 모주리 뇌까리며 대학교수도 훈장도 의사도  사회유지란 신사도 그 잘난 체면이니 교양이니 하는 껍데기를 모주리 벗어놓고 한마리 빨가숭이 짐승새끼마냥 마구 시시덕거리는 모양은 실로 가관이 아닐수 없다.
산은 이렇게 인간에게 너그럽고 이 탓없는 자연속에 인간의 행위는 허뭏 없어지는 가 생각하니 악동들 같이 덤비는 꼴들이 측은하기 그지 없어지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청량한 바람과 함께 풍기는 풀냄새며 나부끼는 꽃들이 어쩌면 채색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 속에 선것 같다.
망새꽃,취나물 꽃, 도라지,창포,사라리,수국 할것 없이 형형 색색을 다투어 자랑하는 이 천웍백 고지의 ''꽃대봉''은 아무래도 천상 선녀들의 유원지였는지 모른다.

 
왁자히 자지러질듯
눈부신 웃음소리

잎잎이 고운 몸짓
바람도 향그러이

풀바다 꽃이랑 위에
흰 구름이 떠간다.

피아골
적적히 말없는 골짝! 버꾹새 소리가 슬프게 울어 올뿐 등성이에는 고추잠자리가 축제일 처럼 날라있는 지극히 평화로운 골이다. 어디메 핏자국이 있는가? 싸움에 허물어진 자취나 보이는가? 사진들을 찍고 이야기가 부산할 뿐 피아골은 듣기만하고 말이 없다.
그날 치열하던 전투를 마치고 능선을 넘어 설 때 애절한 부르짖음 같은 ''꽃대봉''의 몸짓에 목이 메인 전우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한장 치욕 속에
역사도 피에 젖고

너희 젊은 목숨
낙화로 지던 그날

지친 능선위에
하늘은 푸르른데

깊은골 칠칠한 숲도
아무런 말이 없고

버꾸기 너만 우느냐
혼자 애를 타느냐?


반야봉(般若峰)
지리산 중에서 ''천왕봉'' 다음가는 천 칠백 높이의 고악이다. 연만 중에 우뚝 솟아 남으로 ''백운봉''을 맞선 이 거악은 우리가 답사하는 마지막 봉우리다.
먼 ''섬진강''의 용용한 흐름과 우리가 넘어 온 무수한 산과 골을 헤어 보니 정말 자연이 구도(構圖)하는 이 크낙한 현상앞에 너무도 하잘것 없는 나의 인간이 초라하기 그지 없어 진다.
구비 구비 뻗어 나간 능선을 눈으로 측량하면서 나는 집 떠나오던 날을 회상해 보는 것이다. 몸 약하기로 소문난 내가 무거운 배랑을 메고 군화를 신고 집을 떠나올 때 전송을 나온 딸년이 -ㅡ우리 엄만 현대식 동키호ㅡ테ㅡ야ㅡ 하고 하루도 못가서 낙오가 되어 돌아올 길을 아예 출발은 왜 하느냐고 놀려대던 그 표정이 이백여리의 험준한 산길을 넘어오는 걸음걸음 피곤에 지칠 때 마다 눈 앞에 떠 올라 혼자 실소하곤 했던 것이다.
젓나무를 위시해서 가지 각색의 수목들이 칠칠히 욱어진 속에 주렁 주렁 잣송이가 여리고 개암이 열리고 머루 다래 으름이 열리고 등꽃은 자주빛으로 피어 드리워 있고 수국도 창포도 토질이 비옥함에 더욱 짙게 핀 꽃빛들!
가을철이나 되어 이 산속에 들어오면 정말 향그로운 과일과 눈부신 단풍에 가슴이 터지도록 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옮기는 걸음이 무거워 지는 것이다.

노고단(老姑壇)

육.이오 동란 전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피서지로 유명했던 별장지대다. 붉은 돌집 깨어진 자취 만으로도 그들의 지난날의 생활상이 보이고도 남는 것이다.
지리산 속에 가장 좋은 이 고원지대를 피서지로 택하여 별장을 짓고, 교회를 세우고, 운동장을 닦고,뿌울을 파고,무한한 자연속에 현대의 문명을 가미한 시설에서 한 여름 동안을 더위를 잊고 살아간 그네들은 정말 인생을 생활할줄 아는 족속들이었다.
지금은 나무 한그루 서 있지 않는 페허된 등성이에 그냥 천막을 치고 피서하는 서양사람들이 몇 세대 보일 뿐 우리가 입산한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세상을 본 셈이다.
빨리 나무를 심고 길을 닦고 이 좋은 산천을 우리들의 생활에 값있게 쓸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욕심에 잠기며 마지막 산을 내린다.  
(1956.8)

 *덧글*
 1958년 간행된 이영도의 수필집 "춘근집"에 수록된 작품으로서,여성이 쓴 최초의 지리산 산행기이다.
2003년 "월간 산"에서 발간한 "1960년대 한국의 산악운동"에서  위 사진들과 당시에 저들이 학술조사연구 팀을 꾸려 지리산종주등반을 한 사실들을 접했을 때,
 당시에 남긴 기록 즉 산행기는 없을까? 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戰火가 채 가시지 않은 시대상황에서 여성으로 종주등반에 참가한 사실 만으로도 경이로운데  
칠불사를 보기위해 덕평에서 범왕리까지 하산했다가 다시 주능선에 올라 종주를 이어간  역동적인 산행을 시조와 함께 기록을 한 진귀한 산행기이다.
당시 학술조사대의 산행동기 및 정황을 "지리박물관 추억의 지리산편에서 부산편 50년대 후반의 학술조사산행 편"에서 읽을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종주대원들이 첫밤을 보낸 "홈바윗골 幕"은 종전 후 도벌이 성행하던 시절 목기막이 산재했다는  유암폭포위 병기막터로
보인다. (지리산길 지도에서는 홈바윗골이  칼바위골로 표기되어있다. 수정되어야 겠다.) 
본문에서의 "세계골"은 대성골이며, "꽃대봉"은 지금의 "토끼봉"으로  이태 著 "남부군"의 내용에 의하면 전쟁당시 빨치산들이 불렀던 이름이라고 전한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으로 폐허가 된 노고단 별장지대에 동란 이후 일부의 선교사들이 천막을 치고 생활을 했다는 새로운 역사를 읽을 수 있기도하다.
 
     
 2 Comments
쏜화살  2019.09.24 12:20  
등반기 라기 보다 탐험기에 가까운 소중한 기록물 입니다.
문장이 예스럽고 고답적 이어서 더욱 정겹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개화 첫연.
"꽃이 피네 한잎 한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우리나라 대표 시조시인 이 호우 선생의 동생이
이 병도 시인 이시군요.
이 호우 선생의 시조는 개화 말고도
 "살구꽃 피는 마을""달밤"이라는
창문에 스미는 달빛처럼 서정적인 시조도 참 좋지요.
오누이 시조 시인으로 유명 하신 여류시조 시인 이신데 이 병도 시인의 시는
한번도 읽어 보지 못했읍니다.
1956년 한국 전쟁이 끝난 바로 이후  등정기 이니까 그리 오래전은
아닌데 세석에서 호랑이 똥을 봤다고 하니
그때 까지 호랑이가 지리산에 생존했었다는 얘기네요.
등반기 중에 판초 대신 도롱이를 걸치고, 군화를 신고 등산, 남부군 사령관 이 현상을
인민군 두목 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흥미롭군요.
당시에는 빨찌 지휘관 이 현상을 그리 불렀던가 봅니다.
산행중에 직접 사냥해서 맷돼지 노루를 불에 궈 먹었다는 얘기도
마치 산적들이 산채에서 바비큐 해먹는 것처럼 신기 합니다.
절간은 전쟁 통에 다 소실 되어버리고 자연석위 3층 석탑만 덩그러니
남아 그아래서 촬영한 일행들 흑백 사진이 그때를 말해 주고 있군요,
봄미나리 라는 의미 인듯한 春芹集도 한번 찬찬히 읽어 봐야 겠읍니다..
그리고 등반기에 선교사 들이 "뿌울을 팠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도
궁급합니다,
어렸을적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큰 짐승 잡으러 지리산 간다는 포수 얘기처럼
재미 있고, 50년대 지리산의 생태와, 산행장비,지리산의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한 희귀한 등반기 덕분에 잘 봤읍니다

서른 여덟의 유부남 청마 유 치환과 스물 아홉의 청상 이 영도의 안타까운 사랑시 올려 봅니다.

행복 / 유 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무제 /이 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관련사진>

*법계사사지에서 첫째열 우측 세번째가 이영도 시인.
앉은이들은 현지인들로 보인다.포터로 고용된듯 하며,좌측 두번째 분이 우천 허만수님으로 보인다.
 


*천왕봉에서.뒷열 좌측 이영도시인.부산산악계의 1세대 주역이신 신업재 오점량 선생(앞줄 우측 첫번째)도 계시다.
 
 


*산행기가 수록된 수필집 춘근집
 

*수필집에 실린 산행기 원본

▣. 암사 청우 산악회 사랑방에서 가져 왔습니다
 
#1

삼월 초사흘
아침 창가에서 듣는 봄비 소리
방울방울, 자그마하다

찌지골찌지골
달뜬 참새들의 저 노랫소리
잘 보인다
잘 들린다

‘푸른길’ 공원
여기저기 튀어 오르는 봄비 소리
눈 감아도 동글동글하다.

-이은봉(1953-)
봄비는 오는 모양새나 소리가 자분자분하다. 거칠지 않고 조용하고 찬찬하다.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 창가에서 봄비 오는 것을 보고 듣는다. 빗소리를 듣되 그 소리가 작고 둥글다고 여긴다. 비가 오니 참새들도 조금은 흥분해서 “찌지골찌지골’ 운다. ‘찌지골찌지골‘이라는 시어는 참새 울음소리를 적은 의성어로서, 시인이 아주 신선하게 찾아낸 것일 테다. 그런데 이 의성어는 묘하게도 봄비 소리로도 들린다.
시인은 봄비에서 어떤 탄력을 함께 발견한다. 봄비로 인해 봄의 생명 에너지는 허들을 훌쩍 넘듯이 더욱 푸르게 위쪽으로 뛰어오를 것이다. 봄비의 성품을 원만한 둥긂으로 이해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빗방울의 방울방울에는 봄의 자연이 다 비치고, 또 들어와 있을 것이다. 마치 먼지 한 톨에 삼라만상이 들어 있듯이.
시인은 다른 시 ‘봄비‘에서 “언제부터인가 왼쪽 입꼬리/ 살짝 올리며 웃고 있는 봄비”라고 썼다. 이 시구도 시인이 찾아낸 절묘한 표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