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정도전 이야기

버팀목2 2014. 6. 30. 20:44

정도전

 

 

이방원은 꼭 정도전을 죽여야만 했을까.

29일 종영된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은 정도전(조재현 분)의 죽음을 막을 내렸다. 고려말 새 시대를 꿈꾸며 새 왕조를 창업한 혁명가인 정도전은 이처럼 죽음으로 자신의 꿈 역시 허망하게 날려야만 했다.

역사 속 정도전은 어떻게 죽어갔을까. 드라마 '정도전'을 비롯해 '용의 눈물' 등에서 보여지는 정도전의 죽음은 처연하기만 하다. 역사의 흐름에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으며 죽음을 당당히 맞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속 기록은 정반대다. 신뢰성이 비교적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초창기 실록 기록이라곤 하지만 드라마 속 정도전과는 전혀 다른, 안타까울 정도의 비굴함까지 느껴진다.

● 종친 사병혁파에 매달린 정도전, '척살왕' 이방원에 "살려달라" 구걸?

정도전이 죽기 직전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종친들의 사병 혁파였다. 종친들이 거느린 만만치않은 군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제 갓 태어난 조선이란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물론 정도전이 주창한 '재상중심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역사가들이 정도전의 요동정벌론도 이와 같은 종친들의 사병을 혁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분석하고 있다.

재상중심주의를 꿈꾸는 정도전은 왕실 종친들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터다. 종친들이 정도전과 마찰을 겪는 경우도 많았지만 워낙 태조 이성계의 정도전 앓이가 심했던 나머지 대놓고 대들지는 못하는 형국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방원이 칼을 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도전 측과 이방원 측은 서로를 제거하기 위한 피말리는 수 싸움을 벌였다. 누가 먼저 나서느냐만이 남았는데 결국 이방원의 기습이 성공했다.

조선왕조실록 속 정도전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 등과 함께 남은의 첩 집에서 자주 회동을 갖었다. 이날 역시 정도전은 남은 등과 남은의 첩 집에서 만남을 갖고 있었고 이방원이 기습적으로 이 집을 포위했다. 정도전은 도망해 다른 관리의 집에 숨었으나 이 관리의 밀고로 끝내 죽음을 맞았다.

정도전은 죽기 직전 작은 칼을 들고 방에서 기어나오는 것은 물론 이방원에게 "예전에도 나를 살려줬으니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걸구걸했다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 재상중심 정도전은 옳았고 왕권중심 이방원은 틀렸나?

이런 기록을 100% 믿기는 힘들듯하다. 앞서 말했듯 실록 초창기 기록은 왕실 정당성을 확립하는 단계에서 기술됐다는 점에서 승자와 패자의 평가가 상반될 수 밖에 없을 터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을 만드는 주축인물이 이방원의 핵심측근이자 정도전의 정적이던 하륜이였던 점을 들면 기록 속 정도전의 죽음을 모두 받아들이긴 힘들어보인다.

이방원은 사극에서 다소 악역을 맡는 분위기가 크다. 역사마니아들로부터 '척살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숱한 정적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정몽주가 그랬고 정도전이 그랬으며 자신의 절대적 지지자였던 부인의 집안도 풍지박살냈다. 최측근들은 물론 왕위에 오르려 형제들까지 죽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기름과 물처럼 상존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꿈꾸던 나라가 너무나 달랐 때문이다. 정도전은 민본(民本)과 재상 중심의 나라를 꿈꿨다. 왕의 손에서만 움직이는 국가는 매우 위험하며 백성들의 뜻을 따라 정치를 펴기 힘들기 때문에 왕과 백성 사이에 있는 '훌륭한' 재상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핏줄로 왕이 될 수 있는 '왕'과는 달리 재상은 능력이 제일 중요시된다는 점도 정도전이 재상중심주의를 꿈꾼 이유다.

이방원은 이와 반대였다. 훌륭한 왕, 특히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가야만이 혼란을 거두고 나라를 제대로 세울 수 있다고 봤다. 물론 여기엔 '왕이 되겠다'는 자신의 야심도 상당히 포함됐을 터다. 이런 이방원에게 '왕은 얼굴마담'으로 남아야한다는 정도전의 말은 용인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전의 민본 주의는 현대사회에서도 매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방원의 생각이 마냥 틀렸다고 보기도 힘들다. 어찌됐든 이방원의 왕권중심주의는 성공했다. 조선이란 나라가 빠른 시일 안에 국가 체제를 완비한 것은 물론 백성들의 삶도 나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이방원이 정적은 물론 측근들까지 대거 제거한 이유는 이후 국가를 이끄는데 장애물을 없애려는 의도가 충분했다는 분석이다. 이방원의 아들이 조선 최고 명군으로 꼽히는 세종이고 세종이 이 같은 치세를 이룩하는데는 이방원이 정적과 권신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또 정도전이 꿈꾸던 재상중심주의 역시 '나쁘거나 멍청한' 왕이 나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위험성을 가진 왕권중심주의와 마찬가지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재상중심주의의 폐혜가 극명하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세도정치다.

●돌아오지 않는 신하들 '함흥차사', 500년 이후에야 신원된 정도전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와도 인연을 끝어야했다. 이미 이방원과 이성계는 정몽주 암살 때부터 사이가 시들해졌다. 이후 사사건건 마찰을 빚더니 세자책봉문제로 폭발했고 정도전을 척살한 후 부자의 연까지 끊어졌다.

이성계는 이후 상왕으로 물러나 자신의 근거지였던 함경도로 옮겨갔다. 이방원이 왕이 된 후 이성계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야사를 보면 이방원이 이성계에 안부를 묻는 신하들을 연달아 보냈지만 이성계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하들이 오는 족족 활로 쏴죽였다고 야사는 전한다. 소식이 없을 때 쓰는 말인 '함흥차사'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성계가 있는 함흥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이성계에 죽어 돌아오지 않아 만들어진 말이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인데에는 그의 능력과 정책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의 아들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슬며시 벼슬길도 나아가게 해줬다. 정도전이 만든 조선경국전을 바탕으로 법전인 경국대전을 만들기도 했고 정도전의 정책의 대거 수용했다.

하지만 정도전만은 달랐다. 조선을 반대한 정몽주가 만고의 충신으로 받들여졌지만 정도전은 역적으로 500년을 죽어서도 살아야만 했다. 이런 정도전이 복원된 것은 조선 고종 때다. 500년이 지나서야 건국 1등공신이 복원된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이지만 조선이 망하기 시작한 시기에서야 그를 알아준 것이다. 이 역시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구하는데 있어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을 높이기 위함이였던 정치적 행위라는 점에서 정도전이라는 인물에 대한 안타까움은 더 커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