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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시고 있었다-1-

버팀목2 2024. 3. 18. 06:13

 

내가 모시고 있었다

                                             김봉은

 

  '내가 데리고 있었다.'

공직사회에서 얼마 전까지 상사가 부하직원들에게 흔히 쓰는 말이다. 퇴직 후에도 무심코 그 말을 사용한다. 사실 가족들이 그 말을 듣는다면 불쾌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수사과 형사계에 입문해서 선배들로부터 업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사용하는 용어가 낯설었다. 선배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해야만 태()가 나고 형사답다는 생각에 업무적인 단어에 적응하도록 노력했다. 대표적인 용어가 '일응(一應)'이라는 말이다. 일응? 한글 사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간접사실로 주요사실을 추정하는 일. 갑이라는 사실로 을이라는 사실을 추정하는 방법. 일본식 한자로 일단, 우선, 어쨌든 의미로 법조계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였다. 검사가 사법경찰관에게 수사 지휘를 할 때 많이 인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 땐 모든 수사 기록을 수기로 작성했다. 그러다가 자비로 사들인 전동타자기로 써서 보고서를 제출했다. 수사서류 결재과정에서 굵은 사인펜으로 사선을 쫙 긋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대부분 수사 전문용어로 함축되어 있지 않고 일기체로 늘어 썼다는 이유 때문이다. 요즘 돌이켜보면 권위주의적인 의식의 발로인 것 같다. 그럴 땐 서투른 타자 솜씨로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어려움을 겪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너를 데리고 있었다'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시대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사비를 들여서 조립식 컴퓨터를 넣었다. 결재과정에 종이 서류에 사선을 그어도 금세 수정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전자서류 시대가 된 것이다공직사회에 대학을 졸업하고 신지식을 익힌 후배들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이제 후배들에게 전자서류 작성 방법과 컴퓨터 작동 기능을 배워야 했다. 이쯤에서 나의 사고가 전환점을 맞는다. 부하직원을 데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모시고 있어야 한다는 걸. 상하관계가 아니고 서로 협력하는 동료관계가 된 것이다.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사람들로 경우회 이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경우회에 최근 퇴직한 후배들이 들어오지 않는 사실을 갖고 토론이 벌어졌다. 어느 선배 '' 요즘 경찰서에서는 청장이 순시를 온다고 해도 당직 근무를 마친 직원이 그대로 퇴근하는 시대라고 했다. 옛날에는 야간 당직을 마치고도 쉬지 못하고 행사장에 아무 불평 없이 동원되곤 했는데 요즘 세대는 높은 분이 오든지 말든지 내 휴무 시간이면 집에 간다는 것이다. 개인주의로 탈바꿈했다며 젊은 세대를 탓하는 투로 말했다. 사실 그런 선배를 탓할 수도 없다. 그 시절에는 그것이 통용되는 시절이었고, 지금은 바뀌지 않았는가.

 

 내 가까운 친구가 행정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했다. 그곳에도 행정동우회'라는 퇴직공무원 친목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자기가 처음 입문했을 당시 주무 계장이나 사무관 과장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선배들의 이야기였다. 후배인 자신도 사무관으로 퇴직을 하였고 자식들을 출가시켜 손자, 손녀를 두고 있는데 직장 선배는 지금도 만나면 자기를 '말단 서기'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때 그 시절 내가 너를 '데리고 있었지 않았냐?'는 식으로 대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안 만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이야기였다.

 인간사회 어디를 가나 이런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옛말에 '개구리 올챙이 적 일을 잊고 산다'라는 말도 있고,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새겨보아야겠다. 우선 나 자신부터 후배들로부터 선배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언행을 가려서 해야겠다는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후배를 만나면 내가 모시고 있었다.”라고 바꾸어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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