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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같은 각시붓꽃

버팀목2 2024. 5. 30. 09:06

 

 

등대 같은 각시붓꽃

 

김봉은

 

 벽방산 정상에서 홍류마을 쪽으로 약 400m 내려가면 매의 형상을 한 돌기둥이 고성만을 응시하고 있다. 그 바위를 일컬어 벽발팔경(碧鉢八景) 중 이경(二景)인 옥지응암(玉池鷹岩)이라고 부른다.

옥지응암 찾아가는 길에 각시붓꽃 한 무더기가 있는데 평상시 같았으면 아! 언제 봐도 예쁜 각시붓꽃이 길을 안내해 주려고 활짝피었네! 하면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했을 텐데 오늘은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불쑥 지나치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산에 대해서는 나를 달인 정도로 알고 있는 지인에게 벽방산의 숨은 명소를 보여주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다. 그런데 옥지응암 접근로를 찾지 못해 여긴가 저긴가 헤매는 중이었으니 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옥지음앙을 찾긴 찾았다. 체면 유지는 한 것이다. 지인은 사람 키보다도 큰 바위를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되돌아 나오는 길도 잡나무 숲으로 인해 찾기가 어려웠다. 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각시붓꽃을 찾았다. 드디어 각시붓꽃 무더기를 보고서야 나가는 길을 찾았으니 그 얼마나 고마운 길잡이인가. 바다를 항해할 때 길잡이가 되어주는 등 댓 같은 역할을 해주는 꽃에 눈인사만 했다. 그냥 지나쳐 왔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길잡이가 되어준 각시붓꽃에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주고 왔더라면 이렇게 후회스럽지는 않을 터인데 옛 만리암(萬理庵) 절터에서 앉아 벽발팔경 중 1경인 만리창벽을 바라보며 애꿎은 내 심사만 탓했다.

 인터넷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개인적으로 전국 산의 비경을 찾아서 인증사진을 올리는 취미를 가진 사람 중에 벽방산의 옥지응암을 찾아왔다가 접근로를 찾지 못하고 헛걸음을 했다는 글을 다수 읽었다. 실제 접근로를 아는 사람과 동행하지 않았다면 산행 지도만으로는 쉬이 찾기 힘든 곳에 숨어 있다. 한번 답습했던 길인데도 두어 번 더 다녀와서야 쉽게 접근로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벽방산에 숨어 있는 명소를 지인에게 알려주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나섰다가 길을 못 찾고 헤맸다면 참 민망한 일일 터. 그날 길 안내를 해준 각시붓꽃에 고맙다는 말을 무언으로 띄워 보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평소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며 사람을 얕잡아 보고 괄시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볼 일이다. 어느 날 그 사람이 갑자기 내게 은인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잘 대해야 하리라. 좁은 동네에 살면서 어느 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이 더러 있지 않은가. 각시붓꽃을 생각해보면서 내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보았다.

 

벽발팔경(碧鉢八景) : 벽방산의 자락에 경치가 좋은 여덟 곳의 비경.

一景 : 만리창벽(萬利蒼壁) 옛 만리터 뒤 병풍처럼 둘러선 천애벼랑.

二景 : 옥지응암(玉池鷹岩) 정상에서 홍류마을 쪽으로 400m 아래 고성만을 바라보는 매의 형상 돌기둥 모습.

三景 : 은봉성석(殷奉聖石) 은봉암 사찰 내 7m 높이의 성석.

四景 : 인암망월(印岩望月) 인암바위 위에 뜬 보름달을 바라보는 즐거움.

五景 : 가섭모종(迦葉募鐘) 가섭암의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빠지는 즐거움.

六景 : 의상선대(義湘禪臺) 의상대사가 참선하여 천공을 받았다는 좌선대.

七景 : 계족약수(鷄足藥水) 은봉암 경내에 기력을 솟게 하는 여덟 가지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물.

八景 : 한산무송(寒山舞松) 안정사를 감싸고 있는 소나무들이 겨울철 찬바람에 춤을 추는 듯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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