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4.06.01(토) 거제 칠천량(漆川梁) 해전길 탐방에 나서다.

버팀목2 2024. 6. 2. 12:10

2024.06.01(토) 맑음

 

 

 

 통영사랑산악회 6월 정기산행으로 거제 칠천량(漆川梁) 해전길 탐방에 나섰다. 

 거제시 하청면 물안마을 물안(옆개) 해수욕장에서 09:30경 출발하여 굿등산~ 대곡재~맹종죽 숲~옥녀봉~옥계(玉筓) 마을~칠천량해전공원까지 5.4km를 3시간 30분에 걸쳐 걸었다.

 물안 해수욕장은 길이 200m, 폭 30m로서 모래가 곱고 물이 맑고 잔잔하며, 규모는 작지만 해안변이 완만하며, 칠천연육교가 개통된 이후 교통이 편리하여 가족단위의 피서객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굿등산은 물안마을 바로 뒷쪽의 산 중턱에 있는 널찍한 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굿을 한 데서 유래한다고 하고,

 옥녀봉은 옥황상제의 딸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칠천도에 내려와 살다 올라갈 날만 기다리다 지쳐 산이 됐는데 바로 옥녀봉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칠천량해전공원은 전쟁의 상흔을 돌아보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는 곳으로,

 1막 : 역사의 메아리 임진왜란속으로, 임진왜란 해전사.

 2막 : 기억의 메아리 조선수군을 만나다, 조선수군의 구성, 조선수군을 보다, 수군의 어두운 그림자.

 3막 : 회한의 메아리 칠천량 해전의 배경, 일본 복수를 준비하다, 일본군의 반간계, 선조의 어긋난 판단, 칠천량 해전의 수장, 원균, 불길한 전조.

 4막 :  아픔의 메아리, 칠천량에서의 패배, 칠천량 해전의 현장, 참상의 흔적.

 5막 : 부활의 메아리, 칠천량 해전의 결과, 전쟁의 상흔/유린당하는 백성들.

 6막 : 칠천의 메아리, 아리라이너 영상관.

 7막 : 치유의 메아리, 추모의 바다.

 8막 : 희망의 메아리, 작품명- 평화의 바다 등 8개의 테마로 구성된 전시관이 있어 역사적 배경과 과정, 결과 조선수군의 역할, 패전 이후 민중들이 어떤 참상을 겪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평소 접하지 못했던 원균과 칠천량해전에 대한 탐구를 학고 온 보람 있는 탐방길이었다  

▣ 출처 : 거제시 '거제 섬&섬 길 칠천량 해전길 종합안내'  

 

 

도로에서 칠천량숲길로 굿등산 정상은 1.39km.

 

굿등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는 정자에서 조망되는 가덕도 연대봉을 당겨봤다.

 

 

자귀나무 위 12시 방향에는 진해 웅산이다.

 

바다 건너 12시 방향에 가덕도 연대봉이다.

 

12시 방향 솟아 오른 삼각봉은 거제 대표적인 진달래 군락지 대금산이다.

 

굿등산 정상에는 돌배나무가 한그로 섰는데 많이도 열렸다. 지나는 사람마다 올 가을에 돌배를 따러 올 생각을 할 것이다.

 

굿등산 정상 정자(해발 161m)

 

 

 

대곡재

 

옥녀봉 입구.

 

옥녀봉 가는 등산로는 정비가 잘 돼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다닌 길이었다.

 

대나무(맹종죽) 숲길.

 

옥녀봉 정상(해발 232.6m)

 

 

 

옥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12시 방향 창원 구산면과 저도를 연결하는 콰이강의 다리(데이비드 감독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따온 이름이며, 다리의 모습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포로들이 콰이강에 건설한 다리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 

 

옥녀봉에서 당겨본 진달래 군락지 '대금산'

 

서당골 입구로 하산했다.

 

뒤돌아 본 옥녀봉.

 

12시 방향 저기가 칠천량 해전공원이다

옥계해수욕장과 씨릉섬을 연결하는 보도교.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에서 바라본 앵산(鶯山)

 

기념관에서 앵산을 배경으로 인증샷!

 

 

저기는 옥녀봉이다.

 

씨릉섬

 

전시관 옆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시관 전경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벌인 해전 가운데 유일하게 패한 해전이나, 전쟁의 원인과 참상, 영향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역사에 대한 통찰과 반성,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기게 한다. 또한 전쟁의 상흔을 돌아보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다. 

 

 

 

 

 칠천량해전은 1597년 7월 16일(음) 삼도수군통제사원균이 지휘한 조선수군이 일본군과 거제 칠천량에서 싸워 패배한 전투이다.

 부산 앞바다로 진공 하여 일본군의 도해를 차단하라는 도원수 권율의 독촉에 통제사 원균은 1579년 7월 12일 휘하 160여 척의 전선을 총동원하여 출전하였다. 

 칠천량과 옥포를 경유하여 7월 14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서 수백 척의 일본군선을 맞이했지만 일본군의 해전 회피로 전투를 하지 못한 채 가덕도와 영등포를 거쳐 7월 15일 밤 10시경 칠천량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군선 700여 척의 합공을 받은 조선 수군은 탈출하려고 진해만 방면으로 이동하다가 일본군의 각개 격파 전술에 휘말려 대다수 격파 당하였다. 다만 해전에 앞서 탈출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거느린 10여 척의 전선만이 보전되었을 뿐이었다.

 이 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 140여 척의 전선이 분멸되었다. 해전의 결과 남해의 제해권을 차지한 일본군에게 전라도가 함락당하고 말았다.    

 

 

 

 

 

 

칠천량해전에서 순국한 무명용사 추모시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들의 위험에 호국의 일념으로 활과 창을 들었다.

세찬 비바람, 거친 파도의 악천후 속에서도 부릅뜬 눈, 힘겨운 호흡으로

온몸이 피응어리질 때까지 노를 저었다.

 

준비되지 못한 싸움으로 천추의 한을 남겼으나

호국에 대한 향기는 매화처럼 피어나고

내 강토, 내 바다를 지키려는 지조와 절개는 천년의 바위로 남았다.

 

군사들의 노 젓는 함성, 힘찬 기상은 오동나무의 깊은 울림 속 곡조처럼

이 강산에 널리 울려 퍼졌고

 

무참히 짓밟혔던 평화의 금수강산, 

필사즉생의 의연한 정신으로 목숨 바쳐 지키었도다.

 

아! 님들의 기상과 절개와 용기는 천태만상 세속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항상 둥그런 본모습을 유지하는 달님과 같았고

 

한없이 꺾어졌던 버들가지에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듯

조국을 위한 일념과 기상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통곡의 울림으로 영원히 살아 움직이리라...

                                                   

                                               무명용사들이 목숨 다해 국가를 치킨 것처럼 국가도 무명용사들의 정신과 희생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해 줄 것을 바라며 이 시를 바칩니다.

                                                                                                                                            2021년 6월 1일 매월동 송명철 쓰다

 

 

 

 

선조 임금과 이순신, 원균의 실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