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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의 빨치산 체험수기 '남부군'을 읽고

버팀목2 2021. 9. 18. 10:35

   부   군

 

글쓴이 이태(1922~97)는 본명 이우태(李愚兌)로 충북 제천군에서 태어났고,

 

국학대학(우석대학 전신) 국문과와 '조선신문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신문'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이후 '합동통신'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는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에 의해 3개 통신사(합동˙고려˙공립)가 조선중앙통신사로 흡수되면서 이태도 전주로 내려가 통신업무를 맡는다.

 

그러던 1950년 9월 20일, 군산 앞바다 오식도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전주지사 기자들은 전북도당 간부들을 따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무명 골짜기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 사령부' 대원이 되는데 그해 추석이 이 책의 시작이다.

 

그 후 회문산 '독수리부대'를 거쳐 당시 남한 빨치산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되어 17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1952년 3월 19일 05시 50분 분대에서 낙오된 후 닷새를 굶은 끝에 지리산 기슭 덕산에서 체포되었고, 남원 수용소에서 6개월여를 지낸 뒤 풀려난다.

 

이채가 체포되는 과정

나는 갑자기 통증이 심해진 발을 질질 끌며 산기슭을 내려섰다.

 

'인간이 사는 세계로 가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더라도 저항을 말자. 개 패듯 나를 팰지도 모른다. 다소곳이 앉아서 맞아주자. 경찰대가 달려오거든 손을 들자. 사살당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운명이다. 몇억 광년을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건 정말 보잘것없는 일이 아닌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논두렁길로 내려서며 나는 다시 한번 지리 연봉을 바라보았다.

   '머잖아 산맥에도 봄이 오겠지. 그렇지. 민자를 위해서라도 빨리 봄이 와야지.'

 

   박민자의 가엾은 죽음을 그때 내가 알 까닭이 없다. 나는 내외공 마을 향해 몽유병 환자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 내려갔다. 산모롱이 신작로가에 양철집 창고가 외따로 서 있었다. 그 창고와 외공 마을을 흐르는 시냇물과의 가운데쯤 이르렀을 때, 창고 속에서 시퍼런 제복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곳이 전투경찰 205 연대 3대대 본부였던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논두렁에 몸을 숨겼다.

"손들엇!"

"총을 버려라!"

고개를 들어보니 내 둘레에는 카키색 제복으로 메워져 있고 총끝이 부챗살처럼 겨누어져 있었다. 나는 손때 묻은 엠원을 논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천천히 두 손을 쳐들었다. 내가 맞아 죽지 않고 굶어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오직 내 손에 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은 그러니까 나의 모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저주스러운 총과 함께 나의 신앙도 끝나버린 것이다.

 

이채가 밝히는 남한 빨치산 약사

 

46년 대구 10월사건

남한에서의 좌익 게릴라의 효시는 당시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1946년의 소위 10월 사건에서 비롯된다.

46년 9월 24일, 대구 철도노조가 반미 군정 파업을 시작하자 10월 1~2일 전평(좌익계 전국 노동자평의회. 대한노총과 대립하던 단체) 지도하에 ㄷ대구시 일원에서 대대적인 지원 데모가 벌어졌고,

 

당시 남로당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 노동법과 사회보장제 실시 등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48년 2월 7일을 기해 단행할 것을 지령했다.

 

2.7 투쟁은 전국적으로 수십 건의 충돌 사건을 유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밀양사건이었다.

밀양읍의 조선 모직 종업원 130명(여공 90명) 이 파업을 시작하면서 가두로 진출하려는 것을 우익 청년단원들이 출동해서 저지하려 하자 쌍방 간에 투석전이 벌어졌고 뒤미처 경찰이 출동해서 공원 측을 전원 체포한 데서 사건이 확산돼 버렸다.

 

제주 4.3 사건

불길은 47년의 3˙1절 사건에서부터 붙기 시작했다.

미군정 당국은 좌익의 폭동설을 이유로 3˙1절 행사를 위한 군중집회를 일체 금지시켰는데 사실은 남로당 중앙은 무기 휴회 중인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 투쟁을 결부시켜 기념행사를 하도록 지시한 바는 있으나,

 

폭동화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군정 당국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제주시에서의 3˙1절 기념집회는 대대적으로 감행됐으며 이것을 저지하려는 경찰대와의 충돌에서 경찰 측의 발포로 시민 7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인심이 흉흉해지자 당국은 육지로부터 경찰대를 대량 증원하는 한편 서북청년단과 민족청년단 등 청년단원 약 700명을 치안유지차 도내에 투입했다. 이 청년단원들과 증원 경찰대의 거친 행동이 도민들의 강한 반발을 사서 사태는 도리어 악화돼갔다.

 

당시 제주도에는 주민들의 자율조직으로 자위대가 부락마다 구성돼 있었다. 이 자위대를 중심으로 부락민들이 경찰지서와 청년단 사무소를 습격하는 사태가 전 도내에서 벌어졌고,

 

섬사람들의 육지 사람들에 대한 배타 의식도 크게 작용했고, 해방과 함께 섬으로 돌아온 귀환동포(인구 절반 됐었다)의 반미 사조도 작용했다. 이것이 남로당의 지향과 부합하여 좌경을 촉진시켰다.

 

4.3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부 자체가 입산하여 전술적인 '유격투쟁' 단계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약 27만이던 도민의 거의 30%가 죽고, 가옥의 75%가 소실된 참극이었다.

 

여순 사건

48년 10월 20일 여수 14 연대의 1개 대대가 제주도 토벌작전에 차출되어 여수항을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전날인 19일 오후 8시경 연대 인사계 선임 하사관 지창수가 40명의 당 세포원들로 하여금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게 한 다음 비상 나팔을 불어 출동부대인 제1대대를 집합하게 했다.

 

잠시 후 잔여 2개 대대의 전 병력도 연병장에 집합시킨 후 지창수는 제주도 출동 거부, 경찰 타도, 남북통일을 위해 인민군으로 행동할 것 등을 선동하자 대부분의 사병은 환호로써 이에 호응했으며 반대하는 사병 3명은 즉석에서 사살했다.

 

약 3,000명의 정도의 동조자를 얻은 반란 부대는 지창수의 지휘로 여수 시내로 돌입하여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20일 미명까지는 여수 시내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사건에서 반란군 측은 392명이 사살되고 2,298명이 투항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란이 여수 ˙순천에 걸쳤으므로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고,  북에서는 '여순 병란'이라는 왕조시대 같은 부정적 이미지의 호칭을 쓰고 있다.

 

사병 중심의 돌발적인 거사였기 때문에 치밀한 작전계획이 결여돼 있었고, 그래서 단 5일 만에 박멸돼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남로당 중앙의 사전 지시나 평양의 지령 같은 것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 뉴스 보도를 듣고 처음으로 사건이 터진 것을 알았고, 평양방송이 몇 시간 내에 이 사건을 보도했다고 하지만, 평양의 중앙통신은 남한의 통신사들이 지국들과 교신하는 것을 잡아가지고 지체 없이 평양방송으로 흘리는 일이 자주 있었으므로 그것이 평양 당국이 사건에 사전 개입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평양 당국은 처음부터 이 사건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으며, 후일 남로당 숙청 때는 박헌영 등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부 내의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건을 꾸민 것이라고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남로당으로서는 뿔뿔이 지리산 산악지대로 도피해 들어간 반란군의 잔여 세력을 시급히 수습해서 유격대로 전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남로당 간부이며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 중 반(反) 김일성 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왔던 이현상이 자진해서 지리산에 들어갔다. 그가 이 반란군 잔여세력을 기간으로 부근의 야산대와 반란에 동조하다가 도피 중인 민간인을 규합해서 조직한 것이 세칭 '지리산 유격대'이며 49년 7월부터는 그 공식 명칭이 제2병단이 된다.

 

편성 당시의 제2병단은 다음과 같은 편제였으며 병 단장은 이현상이었고, 총세 약 50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5연대 (연대장 이영회) 동부 지리산

제6연대 (연대장 이현상) 중부 지리산

제7연대 (연대장 박종하) 광양 백운산

제8연대 (연대장 맹 모?) 조계산

제9연대 ( 연대장 장금모) 덕유산

 

남한 빨치산이 '인민유격대'라는 이름 아래 체제를 정비하고 본격적인 유격투쟁 단계로 들어가는 것은 49년 8월부터였다.

 

같은 해 6월 30일 남북 노동당이 합당해서 조선노동당이 되는데, 이때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계가 대남 정치공작과 유격투쟁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승엽은 유격대를 지구별로 3개 병단으로 통합 편성했는데, 오대산지구가 인민유격대 제1병단으로 이호제가 지휘하는 강동학원 출신 5개 중대 360명.

 

제2병단은 이현상의 사령관이 지리산을 본 거로 한 부대이며 남한 빨치산의 핵을 이루었다.

 

제3병단은 제주도 유격대 사령관이었던 김달삼을 사령관으로 300명이 안동, 영덕 지방으로 침투해 왔는데 강동학원 출신의 정예부대였고 통칭 '동해 사단'이라고 했다, 태백산 지구를 거점으로 삼았다.

 

빨치산의 운명

51년 6월 30일, 승리 사단이 덕유산에 머물고 있던 그 무렵에 개성에서 막은 연 휴전회담은 판문점으로 자리를 옮겨 11월 27일 잠정 접촉선을 합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빨치산들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휴전이 성립되면 유격대들은 협정에 의해 안전하게 북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인민'의 환호 속에 꽃다발에 묻혀 평양 거리를 행진하는 자신의 '영웅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국제법상의 교전단체인 '인민군 총사령부'가 편성 파견한 어엿한 전투 집단이다. 적 후방에 대한 공중 공격이나 공정대 투입이 위법이 아닌 것처럼 적 후방에서 싸웠다 해서 범죄행위가 될 수는 없다. 낙오병은 저항을 할 수 없다는 전쟁법규는 없으니 50년 여름의 패퇴 중 입산한 자도 어엿한 전투원이다.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면 당당히 철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집회에서나 주석단에 높이 앉아 군중을 내려다보는 빛나는 '공화국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대원들은 비관론, 아니 절망론을 생각했다. 무공훈장은 고사하고 '별오리 대회'에서 직접 김일성으로부터 '발군의 조직 공훈자'로 칭송받은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이 정전과 함께 사형대의 이슬이 되고 '유격대'가 그 죄상의 하나로 열거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남한 빨치산이 그 정전회담에서 거론조차 안 된 채 버려진다고야 짐작할 리 없었지만...

 

송치골의 6개 도당 회의        

1951년 5월 하순경 덕유산 송치골에서 이현상 주재하에서 처음으로 '남한 6도 도당 위원장 회의'가 열려 남한 전역에 대한 유기적인 빨치산 조직체계를 형성하고 투쟁방안이 협의되었던 것이다.

 

충북도당 위원장 이성경(정해수)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유영기) 남충렬의 본명은 박우헌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조병하)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김선우) 박영발은 일명 박현석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이영삼)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김삼홍) 김삼홍의 본명은 김병인 ★괄호 안은 부위원장

 

이현상은 '송치골 회의'에서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가 되었고 각 도 유격부대는 차츰 사단 편제로 개편되어 이현상이 사령관인 '남부군 사령부'의 지휘 하에 들게 되었다. 송치골 회의에서는 각 도당 위원장과 이현상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대 격론이 벌어졌고, 남한 전역에서의 이현상의 권위는 그때까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고, 그가 남한 빨치산의 총수로 '추대'된 것도 북의 지시에 의한 것은 아니고 이승엽에 의한 남로계의 공작이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가장 격렬하게 이현상에 대리한 것은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었다고 한다.

경북 봉화 출신인 그는 일제 때부터 건축 토목 노동자로 일해온 진짜 '기본 계급 출신이었다. 해방 후 전평 산하의 토건 노조 위원장, 전평 서울시 평의회 조직부장, 남로당 서울시당 노동부 부장, 남로당 중앙당 노동부 지도원을 거쳐 월북했다,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의 고급 당학교에서 6개월 과정을 마쳤으며 공산주의 이론으로는 이현상을 능가하는 자였다.

이른바 '도까다' 출신답게 고집도 매우 세었던 모양으로 끝내 이 결정에 불복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이 결정에 의한 사단 개편은 대체로 4개월 후인 이 해 9월경까지 완료됐는데, 전남 부대만은 끝내 사단 편제를 거부하고 이현상의 휘하에 들지 않았다.

 

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결정서 제10호(53.9.6) 내용을 들여다보면 박영발의 보고서에 의해 9월 6일 자로 5 지구당을 해체한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부군의 후평 반전이 남로당계의 돌출적인 조치였으며, 송치골 6개 도당 회의에서 박영발이, 방준표 등이 이현상에 반발한 것이 단순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아니라 김일성 파와 박헌영 파의 줄다리기였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승엽의 '조선인민 유격대 총사령관'이라는 직함도 전혀 비공식이었다는 것이 그 후의 북한 문건에 의해 명백해졌다. 결국 이현상은 남한 빨치산 궤멸의 책임을 똘똘 뒤집어쓰고 평 당원으로 격하된 채 빗점골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 이현상은 강원도 후평(춘천?)에서 이승엽으로부터 구두 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전시상황이라도 정식 공문도 없이 구두 지령이라는 것이 이승엽에 의한 조작이라고 김일성 파인 박영발이 알아챘고, 그로 인해 박영발에 의해 이현상이 무장해제되고 의문의 죽임을 당했지 싶습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이채의 남부군 

★덕유산 송치골 6개 도당 위원장 회의.

★남부군 사령부는 달궁골에서 네번째 도당 위원장 회의 소집했고, 10월혁명 기념일에는 전남,전북,경남 3도 유격사단의 씨름선수들을 모아 사단 대항 씨름대회를 열었고, 그날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성대한 오락회도 가졌으며 시작(詩作)대회도 열렸다.

 

※ 이상 두 대목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나오는 내용들이다.

하대치가 전남대표로 결승전에 진출해서 반칙패를 당했다. 

 

이제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1954년 1월 중순 전 전남도당 위원장이며 5 지구당 부위원장이던 박영발이 배암사골에서 토벌대에 포위되자 권총으로자결함으로써 최후를 마쳤다.

경북 봉화 태생으로 학력이 전무한 대신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던 토목 노동자 출신의 박영발은 고집쟁이다운 경직된 원칙주의자였고,

그와 비슷한 교조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방준표의 귀족적이며 폭군적인 작풍과는 달리 군경 포로를 살상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아량도 있었다.

 

54년 1월 31일 방준표는 국군 제5사단 36 연대 정창호 중위의 수색대에 의해 남덕유산 1,046 고지에서 애인 신단순 등과 함께 사살돼 전북 유격대는 완전 섬멸된다.

방준표가 지녔던 문서에서 그가 경남 거제 출신이었고, 대구 사범을 나와 대구 철도국에서 근무하다 10월 항쟁 때 연루되어 월북 후 모스크바 당학교를 수료한 신 인텔리로 원칙만을 고수하는 경직된 공산주의자였다.

 

뒤이어 2월 227일 6.25전 전남도당책이었고 사변 후 전남도당 부위원장과 전남 유격대장을 겸하던 김선우가 광양 백운산에서 토벌대와 교전 끝에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김선우 밑에서 유격대 부사령으로 있던 오금일도 김선우 사망 직후 통명산에서 부상하고 포로가 되는데 연행 직전에 자결하여 결국 전남도당 수뇌부도 54년 2월 섬멸되고 만다.

 

   1953년 12월 1일부터 전개한 국군 5사단의 겨울철 토벌 작전도 이렇게 해서 2월 중에 종료한다. 그 후에도 어쩌다 은신 중인 '망실 공비'가 하나둘씩 체포된 예는 있으나 그것은 이미 '빨치산 투쟁'은 아니었다. 결국 남한 빨치산의 처절했던 역사도 이 2월로써 끝났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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