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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이야기

버팀목2 2022. 1. 12. 07:35

황석영 작가의 대하소설 '장길산'을  읽고...

 

 

 

 

지난해 11/04  황석영 작가의 대하소설 장길산을 대출받으러 통영도서관에 가서 인터넷으로 책 목록을 검색했더니 "0"라고 검색되었기에 그곳 사서에게 물었더니 죽림에 있는 충무도서관에 그 책이 있다고 하면서 시에서 운영하는 시립도서관이다 보니 관내 다른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면 여타 도서관에서는 구입을 안 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충무도서관으로 가서 1~5권을 대출받아 읽기 시작했는데,

소설 배경 지명과 단어들이 낯설어 지명은 '해설 대동여지도'와 단어는 인터넷 검색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11/04 시작하여 2개월 1주일간에 걸쳐 01/10자 '장길산' 1~12권을 끝냈습니다.

 

소설 '장길산'은 시대가 조선 숙종 때의 일입니다.

 

재미사학자 백지원이 쓴 '백성 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부제  '왕을 참하라!'에서,

 

제19대 임금 숙종 때의 전반적인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나 사건에 대한 서술을 참고해 보면,

소설 장길산도 그냥 허구인 소설이 아니라 역사의 한 장을 서술한 것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백지원이 쓴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에 숙종 때의 일들을 보면,

 

먼저 숙종의 아버지 18대 현종은 27명의 조선의 왕 중에 유일하게 아내가 한 명뿐인 임금이었는데 

이는 명성왕후(고종의 명성황후 다른 인물) 김 씨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설이 있었고,

 

현종의 아버지 효종이 죽자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다투었는데 이를 '예송논쟁'이라 하고,

 

1차는,

효종이 승하했을 때 효종의 작은 어머니인 인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자의대비(37세), 효종은 42세, 아들보다 5살 어렸고, 하지만 자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 이자 효종의 어머니이며 현종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습니다.

 

□ 1차 논쟁 기해 예송,

효종 승하하자 자의대비 상복 기간을 서인은 인종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1년,

남인은 엄연히 왕이기 때문에 사대부와 달리 3년.

1차는 숙종이 서인의 손을 들어주어 서인 승,

 

□ 2차 논쟁은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친어머니인 인선 왕후 승하 시 갑인 예송.

이때도 자의대비 상복 기간 서인은 인선 황후가 차남의 아내로 9개월, 남인은 왕의 아내로 1년 주장.

2차는 남인 승.

 

사실 예송은 상복을 몇 년 입느냐 예법의 문제가 아니고,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로 왕위로 오른 효종의 정통성을 신하들이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대립한 문제.

 

 

다시 숙종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숙종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고, 온몸에 화증이 가득했고 성격도 아주 괴팍했는데 그의 어머니 명성왕후도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성질이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다르니 애미도 감당이 안되는구나"하고는 한탄했답니다.    

   

숙종은 1674년,

현종(18대)이 죽자 그의 외아들 14세의 돈이 숙종으로 즉위했으며 45년 10개월을 재위했는데 영조(21대) 다음으로 재위 기간이 긴 왕이었고, 부자지간 거의 1세기를 재위했습니다.

 

숙종은 열 살 때 서인의 골수분자 김장생의 손자인 김만기의 열 살 난 딸과 혼인했는데 그녀가 인경왕후 김 씨입니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친동생이 《사씨남정기》와《구운몽》을 쓴 김만중입니다.

 

인경왕후 김 씨는 후사 없이 스무 살에 죽자 서인들은 역시 서인가의 여인인 여흥 민 씨를 숙종의 계비로 들였는데 그녀가 장희빈과 양립할 수 없었던 인현왕후 민 씨입니다.

 

□ 환국의 시대 1 - 경신환국

숙종이 처음 집권했을 때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았는데 남인의 영수 영의정 허적이 할아버지가 국가로부터 휘호를 받아 잔치를 열었는데 잔칫날 비가 내리는데 이를 걱정하던 숙종이 비가 오니 허적 잔칫집에 왕실에 있는 유악(기름 천막)을 가져다 주어라 했는데 왕실의 보물 유악을 허적이 미리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하니 숙종이 인심 쓸려다 보니 영의정이 왕실 재산을 임금에게 고하지도 않고 가져갔으니 대가를 치러야지요 

 

"허적의 아들 허견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으로 남인의 몰락.

 

□ 환국의 시대 2 - 기사환국

첫째인 인경 황후가 20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고, 서인 민유중이 딸인 인현왕후가 들어왔는데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궁녀로 입궁한 장희빈과 숙종이 친하게 지내자 인현왕후가 들어오기 전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새로운 왕비가 들어올 텐데 숙종이 장희빈에게 너무 빠져 있으면 안 된다고 궁궐 밖으로 쫓아냈는데 궁의 안주인이 된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장 씨를 궁에 부르소서"

 

그래서 입궁한 장옥정이가 아들을 낳았는데 2달 만에 원자로 삼겠다고 선언을 하자 왕비인 인현왕후가 26세밖에 되지 않았기에 후사를 볼 가능성이 있다 하면서 원자를 반대하던 서인의 대부 83세의 송시열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지고 사약을 내렸고, 서인들이 줄줄이 귀양 보내지고 남인을 복직시킨 사건이 '기사환국'.

이로써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고 궁궐 밖으로 쫓겨나고...

 

□환국의 시대 3- 갑술환국

인현왕후 몸종 무수리 최 씨 등장

숙종이 어느 날 궁궐을 거닐다가 어느 방에 촛불이 켜져 있어 가보니 웬 무수리가 상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인현왕후 생일인데 궁궐밖에 계시니 이렇게라도 중전마마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라고 아뢰었고,

그날 밤 숙종의 환심을 얻은 무수리 최 씨가 훗날 아들을 낳고 숙빈이 되고 이때 낳은 아들이 연잉군, 즉 21대 임금 영조.

 

서인들이 인현왕후 복위 운동으로 다시 왕비에 오르게 된 것이 갑술환국이고,

이로 인해 장희빈은 후궁 희빈이 되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인현 왕후의 죽음을 바라는 저주를 내렸다가 인현왕후가 죽자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사약을 받을 수 없다며 버티다가,

 

《수문록》이라는 야사 집에 숙종이 내린 사약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발악하다가 자기 아들인 훗날 경종의 아랫도리를 잡아당겨 경종이 아이를 못 낳게 되었는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실제 경종은 두 명의 왕후를 두고 4년간 재위했으나 자식은 없었습니다. 

 

□ 화폐경제의 정착

숙종 4년 영의정 허적과 좌의정 권대운이 화폐 유통을 건의했다. 조선조 태종(3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화폐 유통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건의를 받고 숙종은 호조에 의해 '상평통보'를 주조하도록 했고 돈 400문을 은 한 냥 값으로 시중에 유통했고, 1문이 2돈 5푼, 돈의 단위는 10푼이 1전, 10 전이 1냥, 10냥이 1관이었고 상평통보를 관료들의 연봉으로 지급했습니다.

 

□ 후계 구상

전국에 자연재해가 몰아치고 역질이 돌아 숱한 사람이 죽었고,

병에 지친 숙종은 이이명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했고, 세자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뒷날 연잉군(영조) 왕세제로 삼아 왕위를 계승토록 지시했습니다.

 

□ 남인의 분화, 청남과 탁남(숙종 4년)

□ 남인의 몰락(경신환국 1680)

 

□서인의 분화, 노론과 소론

□ 송시열의 죽음

 

□ 요승 처경

 

□ 서인의 몰락, 기사환국(1689)

□ 남인의 몰락, 갑술환국(1694)

□ 숙빈 최 씨

 

□ 당쟁의 극치

현종과 숙종 때 극에 달했습니다. 숙종의 아들 영조와 영조의 손자 정조(22대)가 당쟁을 없애보려고 탕평책을 적극 추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당쟁이 얼마나 심했는지 복식도 틀렸습니다.

저고리의 깃과 섶을 둥글게 접은 사람은 노론이고,

깃과 섶을 각지게 접은 사람은 소론.

여자들도 치마 주름이 굵으면 노론, 소론은 잘게 접었습니다.

 

결국 대원군이 집정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이 당쟁을 해결하지 못했답니다.

 

오가작통법

 조선초부터 시행하던 향촌 정책을 숙종 대에 강화되었습니다

양반을 제외하고 평민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역모, 강도, 절도 등을 고발학 한 제도입니다

 

□ 조폭

17세기 말에는 검계니 살주계, 살라계, 홍동계 따위가 잇었는데 무뢰배들은 조직을 만들어 검을 차고 다니며 무예를 연습하고 여염에 돌아다니며 행패, 기생의 기둥서방을 하면서 뒤를 봐주거나, 떼인 돈을 받아 주기도 하고 달아난 노비를 잡으러 다니는 일도 했습니다.

 

이 또한 장길산 소설 속에서도 활동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장길산

18세기인 숙종 연간에 광대 출신 명화적 장길산이 거의 10년에 걸쳐 황해도 일대를 주무대로 활약했다고 써 놓았습니다.

장길산은 운부의 제자로, 운부는 중국 출신의 망명자로 70이 넘은 노승이었고, 천문 지리에 통달했다고 하는 운부는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렇게 제자를 키워가면서 나라를 뒤집어엎을 계획을 세우던 운부 일당에 대한 고변이 들어왔는데 의금부에서 운부의 수하들로 알려진 인물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는데, 운부와 직계 승려들은 행방이 묘연했다고 하며 밀고한 놈을 족치니 거의 다 조작한 소설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장길산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고,

조선의 3대 의적인 홍길동과 임꺽정은 모두 잡혀서 처형되었는데 장길산은 잡혔다는 기록은 없다고 하며 아마 금강산 어디에서 조용해질 때까지 10년 면박에 들어갔다가 끝내고 나서 산속 깊이 묻혔다고 추정합니다.

 

당시 썩어빠진 조정과, 탐학과 수탈에 몰두하는 지방 수령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명화적이나 반란군에 동조하여 일어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영조(21대) 대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소설 '장길산'에서 장길산은 탈출한 사노비의 아들로서 아버지 명근 스님은 아들이 태어난지도 모르고 사노비에서 탈출하여 스님이 되었고,

어미는 다리 밑에서 장길산을 낳고는 죽는데 그때  문화 재인 마을 모가비 장충이 아기를 받아 동냥젖으로 장길산을 키워 광대로 만들었는데,

 

장충이 활인해 온 묘옥이가 먼저 장길산과 인연을 맺고는 가슴팍에 길산의 이름자인 '吉'자 연비를 새겼는데도

장충의 아내는 신딸로 데려와 같은 집에서 키우던 봉선이와 길산을 결혼시킵니다.

 

이후 길산은 타관에서 죄를 짓고 사형수가 되었는데 주변의 조력으로 탈출하게 되었고, 묘옥은 길산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으로 알고는 자진하려다가 구사일생으로 여환 스님으로부터 구하여지고,

 

탈출한 길산은 구월산 풍열 스님을 찾아갔다가 금강산 운부 스님을 소개받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글과 무술을 읽히게 됩니다

 

장길산과 더불어 녹림 처사로 활동했던 인물로는,

송도 박대근,

봉산 김기

문화 장길산, 이갑송

해주 우대용

한양 마감동

장연 강선홍 등이 義를 나눈 형제의 결의를 맺었고

 

산적들의 토포장으로 활약했던 최형기는  이 소설 마지막에 한 수 위인 장길산과 대결을 벌여 팔이 잘려 나가고 장길산의 부하가 쏜 화승총에 맞아 운명을 하고 목이 잘려 관아에 걸립니다.

 

이후 한양의 궁궐을 접수하기로 한 의적들과 승병들은 거병을 하기로 한 3월은 농번기라 12월로 넘기자는 운부 스님의 결정에 따르다가,

고변이 있어 한양 주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거의 토포 되어 처형되고 장길산은 일행들을 데리고 먼 훗날을 기약하여 함경도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조정에서는 전국적으로 장길산이 나타나서 조선천지를 어지럽히고 장길산의 활동 무대인 해주 감영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봉산 은파 단오장터에서  장날 탈놀이 판의 취바리꾼을 장길산으로 만들어 죽이고 맙니다.

이로써 장길산으로 인한 백성들 간의 소동은 잠재워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