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1.10.07(목)

버팀목2 2021. 10. 7. 10:18

2021.10.07(목) 맑음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 이어 이채의 '남부군' 그리고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어 왔던 빨치산 이야기였는데,

 

정권이 우와 좌를 바뀌기를 여러 차례 겪었고,

이제는 남도에서는 여순사건까지도 떳떳하게 그 고장 역사문화관에 전시를 한 세상이 도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뭔지 알아야 겠다는 일념에 책을 손에 잡게 되었고 

오늘 정지아 작가의 '빨치산의 딸'을 끝을 보았습니다.

 

정지아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의 이름인 지아가,

'지'자는 지리산, '아'는 백아산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듯이 빨치산이 딸이 분명 맞았습니다.     

 

그리고,

소설 '빨치산의 딸' 그 내용중에 내가 되새겼던 주요 대목을 필사해 보았습니다. 

 

   " 이 개새끼! 역시 거물이라 지독하구만. 누가 이기는지 어디 두고 보자

구! 야! 권상수! 들어와!"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졌다. 권상수가 배신을 하다니! 동지들을 팔아

먹는 앞잡이가 되다니! 적들의 총소리만 들리면 얼굴색이 샛노래지도

록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권상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걸 생각

하지 못했던가.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던 권상수였는데.

 

   "야! 이 개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이 새끼 앞에서 직접 얘기해주라구!"

 

   "위장 자수했는데, 일하기가 어렵다고 ······."

 

   발등을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두가 그의 실수였다. 하루아침에도

모든 게 변하는 세상인데, 어떤 위협도 받지 않고 있는 김춘옥마저 변하

는 세상인데, 군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나온 권상수를 믿다니! 권상수

의 조작이라고 맞서며 끝내 부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를 팔아 얻은 권상수의 생명은 오래가지 않

았다. 경찰에게 한 번 꼬리를 물린 권상수는 그 후로도 계속 경찰의 앞잡

이가 되어 수십 명의 동지들을 감옥으로 팔아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례

군당을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 군당으로 재 입산했다가 권상수의 정체를 

눈치챈 군당 성원들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일수

록 죽음은 집요하게 쫓아다닌다. 권상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배신자들의

최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자 그는 1월 초 순천 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검사

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의 검사는 순천검찰 지청장으로 일제시대부

터 검사 노릇을 했던 친일파였다. 아무리 닦달해봐야 위장자수에 대한 증

거가 나타나지 않자 검사는 곡성경찰서로 연락하여 그가 곡성 군당 위원

장으로 재직했던 시절 곡성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그의 책임으로 떠넘

겼다. 살인, 방화, 강도, 절도, 공공기관 파괴, 국가보안법 위반, 이적 행위,

비상사태와 특별조치령 위반 ······. 그도 자신의 죄목을 일일이 다 외울 수

없을 정도였다.

 

   54년 3월 30일 언도 공판이 열렸다. 검사의 논고가 시작됐다.

   "······법이 허용한다면 즉석에서 사형을 집행해도 시원치 않을······."

 

   그는 검사의 구형이 끝나기 바쁘게 벌떡 일어섰다.

 

   "김왕규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요. 나는 

적어도 우리 조선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

으나 김왕규는 일제시대에 일본 정부의 관료로 출세한 친일파요. 그런 친

일파가 해방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애국자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오. 김왕규는 자기 입으로 자기

를 애국자라 하며 나를 비애국민으로 매도하지만 과연 누가 애국자이고 누

가 비애국민이오? 내가 취조를 받기 위해 검사 방에 갈 때마다 김왕규는

양담배를 수북이 쌓아놓고 피워댔소. 전쟁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경제를 

부흥, 발전시켜야 할 이 마당에 양담배를 피워대다니! 그가 과연 애국자

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오.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이 민족을

위해 살았으며, 나에게 사형이 아니라 능지처참 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애국적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한 미제의 앞잡이들이 선고하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소!.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때까지 재판을 지

켜보던 종조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비록 사형을 받았을망정 내 속이 후련하구나!"

 

   종조부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김왕규에 대한 그의 비판에 종조부

는 시원했던 것이다.

 

   55년 봄 어느 날 누님이 면회를 왔다고 해서 나가봤더니 다시 오지 말

라고 했던 그의 아내가 함께 와 있었다. 순천 검찰청에서 보고는 처음이었

다.

   "아주머니는 뭐 하러 왔소?"

   "미안하오! 나는 언제 햇빛을 볼지도 모르는 사람이오. 다시는 찾아올

필요 없소. 부디 행복을 찾으시기 바라오."

 

아내가 다녀간 뒤로 자주 김춘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별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김춘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그 봄이 가기전 김춘옥이 그를 찾아왔다.

창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서야 첫사랑에 잠 못 이루는 소년처럼

설레던 그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동안 김춘옥은 놀랍게 변해 있었다. 뽀얗게 분칠 한 얼굴에 새빨간 입

술 연지······.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없이 김춘옥을 쳐다보았다.

분칠이 얼룩덜룩 지워진 얼굴에 한 가닥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혁운 씨······. 부모님이 혁운 씨 결혼한 사실을 알았어요. 다른 건 몰

라도 그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서······."

 

   차라리 김춘옥이 아무 말 없이 돌아서 갔다면 그는 단 한 번의 사랑을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고통스

러웠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 것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달라졌고, 그녀는 끊임없이 이전의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부대끼고 수십 번씩 마음을 바꾸고 번민했을 것이

다.

 

   "부모님은 자꾸 다른 데로 결혼하라고······. 저는 어떡해요? 혁운 씨,

저는 어떡해요?"

 

   "결혼하시오. 지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55년 봄 전남의 마지막 빨치산 김병극이 형이 확정되어 광주형무소로

넘어왔다. 김병극은 전남 총사령부 7 연대 조용식의 연락병이었던 사람으

로 인민군 출신의 소년이었다. 김선우도 죽고 도당이 완전히 박살난 후

김병극은 백운산 기슭에서 혼자 보급투쟁을 하며 몇 달을 살았다고 한다.

 

   김병극이 생포되기 전, 전남도당의 간부부장 강경구가 53년 가을에 그

때까지 살아남은 모든 성원 40여 명을 총 규합하여 산성부대라 칭했다. 전

남도당의 마지막 조직인 셈이었다. 강경구는 문득 김용원이 나주에 지하

사업을 하러 들어갔다는 말을 기억해내고 그들과 접선하기 위해 백운산

을 출발하여 조계산, 모후산, 백아산을 거쳐 장흥 유치로 갔다. 김용원에

게 빨치산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보급투쟁을 하며 일부러 노출을

시도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김용원의 소식은 없고 도내의 전 경찰병

력만 그들에게 집중했다. 하는 수 없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백운산으

로 되돌아오던 산성부대는 보성 겸백면에서 경찰의 공격을 받고 단 한 사

람의 생존자도 없이 전원 전사했다. 전남의 조직적인 부대로서는 마지막

전멸이었다. 김병극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모두 한숨만 내

쉬며 말이 없었다. 누군가는 이 비운의 역사를 원망하기도 했고, 누군가

는 휴전협정 때 남한 유격대 문제를 제외시킴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는 유

일한 길을 막아버린 북쪽에 원망을 토로하기도 했다.

 

남한 유격대의 비극적인 최후를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든 54년 봄

남한에서의 모든 사회주의 활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지리

산에서는 정순덕 외에 몇 명이 살아남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유격활동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배식 문제를 제기하여 단식투쟁을 하다가 단식한 목적은

달성됐지만 단식 선동죄로 금치 2개월을 언도받은 그는 뒷수갑을 찬 채 개처럼

엎드려 입으로 밥을 먹으며 두 달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가 징벌방에서 풀려났을 때는 이미 배식량도 그가 단식하기 전으로 돌아가

었다. 해벌은 되었지만 취업은 금지되어 그는 미지정방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 못 잊을 동지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김규효.

그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탁월한 이론가이자 실천가이기도 했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그는 애꾸였다.

돈도 없는 데다 애꾸인 자식에게 그의 아버지는 소학교만 졸업시켜주고

농사나 지으라 했다. 무단가출을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제대를 졸업한

그는 해방 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해다가 46년 국대안반대투쟁 시

월북을 했다.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규호는 6.25 직후 대일 지하당 조직책으로

일본에 건너갔으나 52년 체포되어 미국의 극동군사령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미 CIA가 북한의 내각 간부학원 졸업사진까지 내밀며 그의 지하조직 활동을

추궁했지만 일본 사회당의 강력한 비호와 160명이나 되는 일본 인권옹호 변호

인단의 변론으로 추방명령만 받고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그는 그곳에서

대부분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여 밀항해온 수용자들을 선동하여 탈옥에 성공했

으나 나고야에서 다시 체포되어 한국 정부로 넘겨졌다.

김규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김규호가 있는 방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형무소에 들어와서 그렇게 규

칙적이고 명랑한 생활은 처음이었다. 오전에는 마르크스주의 강의, 오후

에는 역사 강의, 밤에는 각자 자신들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자유토론을 하

거나 오락회가 열렸다. 다른 방에서는 형무소 벽돌담의 해그늘만 하루 종

일 바라보며 밥때를 기다렸지만 이 방에서는 행여 밥이 와서 얘기가 중단

될까 봐 조바심을 낼 정도였다. 적국에 인질로 잡혀가야 했던 공민왕의 서

러운 생애와 노국공주와의 애절한 사랑 얘기에서부터 실존주의, 카뮈와

사르트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과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김규

호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노래라면 문외한인 그에게 예전부터 좋아

하면서도 배우지 못해 못 부르던 노래를 가르쳐준 것도 김규호였다. 차가

운 마룻바닥에 다리를 괴고 앉아 바싹 마른 몸을 이리저리 경쾌하게 흔들

며 김규호는 한 소절씩 그에게 노래를 알려주었다.

 

   북방 나라 소비에트는 인민이 다스리는 평화한 나라

   각 공화국 민족들의 영원한 친선을 도모해

   콜호스에 밤이 오면 춤과 노래 시작된다

   춤과 노래에 엉키어 즐거운 이 밤도 깊어가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콜호스에 밤이 오

면 춤과 노래······ 콜호스에 밤이 오듯이 백운산에, 백아산에 밤이 오면

그들도 모닥불을 지펴놓고 춤과 노래로 오랫동안의 피로를 풀었었다. 그

때의 동지들은 모두 어디 있는가. 곱새춤을 추던 김흥복, 어울리지 않게

난 못해요오 하고 아양을 떨다 인민항쟁가를 소리 높여 부르던 양봉순, 김

춘옥과 그가 결혼하면 주례를 서주기로 했던 김선우, 언제나 형님처럼 그

를 아껴주던 오금일, 지쳐 쓰러질 때까지도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꼿꼿이 앉아 있던 박영발, 곡성 전투 때 비겁하게 살려면 당신이나 도망가

라고 소리치던 문춘, 야광시계를 선물해준 박종하······ 이제야 노래를

배우는 그의 눈앞으로 숱한 동지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57년 봄이 왔다. 그해 봄은 좌익수 전향 문제로 떠들썩했다. 출역하던

모든 좌익수의 출역이 금지됐다. 전향한 자에게만 출역이 허용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향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김규호에게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선생님,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저

는 지금까지도 저의 임무가 바로 조직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대

부집 아씨처럼 안방에만 갇혀 산다면 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대

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 아닙니

까?"

 

   김규호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면 그래야지요. 취업 중에 있는 우리 동지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동지도 반드시 필요하오. 동지가 그 일을 하시

오. 동무의 말이 옳소."

 

  전향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김규호의 말을 듣고도 그는 한동안 망설였

다. 김춘옥을 데려다주러 갔다가 자기까지 자수를 해야 했던 그날의 복

잡한 심정과 똑같았다. 전향서 한 장에 지금껏 가져왔던 사상이 하루아침

에 그야말로 전향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서글픔, 분

노······, 온갖 생각이 들끓었다.

 

7월 4일 그는 드디어 전향서를 썼다. 이름이야 어찌 됐건,

또 어떤 마음으로 전향서를 썼건, 아무것도 아닌 종이 쪽지는 바로 덫이

었다. 전향서 한 장에 대우가 달라졌고 환경이 달라졌다.

 

전향서를 쓰는 사람이나 쓰지 않은 사람이나 당시의 생각은 거의 비슷했

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 년, 이십 년이 지난 후 그들은 분명 달랐

다.

 

한쪽은 어쨌거나 자본주의의 질서 속에서 살았고, 한쪽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살아왔다. 천사백 명이 넘는 좌익수 중 백여 명만이 전

향을 거부하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특사에 남았다.

 

그들에게는 솔방울만한 밥 외에 모든 사식마저 금지되고 출역도 금지되

었다. 그들에게 죽음 직전까지 영원한 격리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겠다는 자신의 임

무를 완수하기 위해, 김규호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사상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내키지 않은 전향서를 써야 했던 그가 정말 그의 의지대로

실천했는지는 여기에 쓸 수도 없고 쓰고 싶지도 않다. 현재까지의 정권이

어떻게 사상범을 취급하고 얼마나 가혹하게 민주주의를 탄압해왔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후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과 좌절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 금지하는 사상을 머릿속에 지니고 일거수일투족

을 감시당하며 좌절을 느낄 때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김규호의 미소

를 떠 올렸다. 김규호는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사상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살다 죽었다.

 

   나는 무엇인가? 살아남아서, 세상으로 나와서 무엇을 했는가? 스스로

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철저하지 못한 사상성 때문인가, 아니면 반

동의 시대 때문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아무튼 그는 전향을 했다. 그

가 가장 존경하던 김규호는 그대로 특사에 남았다. 그가 사랑했던 많은

동지들은 남녘의 산과 들에서 죽었다. 남한에서의 치열했던 사회주의 운

동은 교도소 특사에 갇힌 채 막을 내렸다. 그의 앞날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과 치욕의 삶이. 1부 끝

 

2부

이옥남의 삶, 남편을 따라 빨치산이 되고 남부군으로 활동하다

 

남부군의 최후

 

경남도당은 조개골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와 유화열, 그리

고 강태봉 세 사람은 지하공작 사업의 임무를 띠고 도당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며 지하침투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사진기로 사진도 찍었다. 도민증에 붙일 사진이었다. 지리산에서의 마지

막 여름이 무성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옥자 동무, 먼저 내려가서 토대를 닦아놓고 부를께요. 그때까지 꼭 건강

하게 살아 있어야 해"

 

   속정이 깊어 드러나지 않게 이모저모로 그녀를 아껴주고 도와주었던

유화열이 자꾸 뒤돌아보며 멀어졌다. 그들의 연락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가 저물었다. 건강은 나날이 악화됐다. 빨리 연락이 오지 않으면 그대로

산에서 죽게 될 지경이었다.

 

   남한 전체를 통틀어 그 무렵 얼마쯤의 빨치산이 남아 있었을까. 경남

도당에는 이영회의 57사단까지 포함해서 쉰 명도 되지 않았고 남부군 역

시 비슷한 숫자였다. 전남만 백여 명 이상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

들은 휴전협정에서 빨치산들의 거취 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기대했다가

낙담하기도 했다. 휴전회담이 빨치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건 이제 몇 가

지 선택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혁명투쟁을 포기하고 살기위해 자수하는 방법이었고,

 

둘째는 언젠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해방을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유격투쟁을

지하조직 사업으로 바꾸는 것,

 

셋째는 사라진 꿈과 더불어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수차례 연구하고 실시했으나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때 

까지 살아 있던 대다수의 빨치산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세 번째를 선택

했다. 이전까지는 해방의 그날이 목전에 있음을 믿고 싸웠다. 이제는 멀

어진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휴전 소식과 비슷한 시기에 남로당 고위 간부들의 간첩행위와 종파주

의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빨치산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

리였다. 자기들이 믿고 따르던 지도자들이 미제의 앞잡이라는 것이었다.

이승엽 간첩사건을 전해 들은 이현상은 놀라움에 말을 잃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는 곧 5지구당 조직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현

상은 박영발과 방준표에게 그동안의 사업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당했다.

 

비판의 첫째 이유는 52년 남부 지도부 결성 시 이승엽이 여운철 개인에게

준 신임장을 마치 중앙당의 지시인 것처럼 남조선 전체 유격투쟁에 확대

시키고 종파적 행위를 하여 남조선의 당과 유격투쟁의 지도권을 장악하

려고 했다는 점,

 

둘째는 지리산에 도착한 이후 남부군의 유격투쟁이 유격투쟁의 기본원칙

을 벗어난 정규전 식으로 수행됨으로써 엄청난 피해를 입게 했다는 점,

 

셋째는 간부로서 마땅히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남부 지도자 초창기부터 가장 원칙적으로 이현상에게 따지고 들던 박영

발은 종파분자이며 미제의 간첩인 박헌영 일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

학을 다녀온 자신의 과오를 자기비판하면서 전남도당 위원장직을 사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난 후 이현상에게도 마땅한 자기비판을 요구했다.

 

침통한 표정으로 동지들의 비판을 듣고 있던 이현상은 결국 자신의 모든

과오를 인정하고 5지구당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이로써 5지구당이 해체되고 여순사건 이후 선봉에서 남한 유격투쟁을

이끌어오던 남부군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남부군의 생존자들은 5지구당 해체 이후 지리산 인근의 도당과 군당으로

분산 배치된다. 전투부대는 인민 여단의 참모장을 지냈던 김태규를 부대장

으로 하여 구례 군당으로 보내졌고 대부분의 정치간부들은 경남도당을 선택했다.

 

   남해로 침투한 유화열의 소식이 오기만 기다리던 그녀는 9월경 뜻밖에

도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남부군 동지들을 경남도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다들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때부터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토론회가 매일

개최되었다. 간첩행위를 했다는 이승엽 일파는 물론이고 이현상까지 종

파주의자라며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미제의 앞잡이들에 대한 비판은 물

론 당연한 것이지만 그녀는 이현상이 종파주의자라는 것만은 도저히 받

아들일 수 없었다. 49년부터 최근까지 이현상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

봤지만 그녀는 이현상이 비판받을 만한 오류를 범한 적은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바로 여성문제였다. 몇몇 간부들이 그녀에게 이현상과 의 

무요원인 하수복의 관계를 넌지시 얘기하며 잘 보살피라고 했을 때도 그

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녀가 감각이 둔하다기보다는 그만큼

철저하게 이현상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하부원들이 그 정도로 믿고 따

를 만큼 이현상은 철저했다.

 

   남부군 출신들이 그런 비판회에 곤욕스러워하고 있던 그 무렵,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은 호위대까지 다 다른 곳으로 떠나보낸 후 부관만을 데

리고 경남도당으로 오던 중 경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  (이현상의 죽음에

관해 여러 가지 추측들 - 남로와 북로 간 헤게모니 투쟁의 희생양이라든가-이

난무하고 있지만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종파주의자든 아니면 역으로 종파주의에 의해 희생당한 제물이든 분명한 것은

남한 현대사의 한 장을 장식할 유격투쟁의 지도자였으며 남부군 대원들에게는

친아버지와 같은 존경을 받던 한 탁월한 혁망가가 유격투쟁의 본거지인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쳤다는 사실이다.

 

혁명을 위해 자신의 삶 전부를 바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똑같은 것은 아니

다. 그는 진보하는 역사의 편에 서서, 핍박받는 민족의 편에 서서, 고통당

하는 인민과 함께 자신을 불태운 것이다.

 

   이현상이 죽고 난 두 달 뒤 대성골 전투에서 살아남은 서른 명가량의 대

원과 함께 계속 투쟁하던 14연대 출신 이영회의 57사단도 의령경찰서를

점령하여 보급품을 잔뜩 챙겨 산청까지 무사히 퇴각하여 원지면의 강노마

을로 해서 뒷산으로 올라가서 열두 살짜리 소년에게 보초를 세우고 달콤한

잠에 취했다가 소년까지 곤하게 잠에 떨어진 상태에서 뒤쫓아 온 경찰에 의

해 전원이 전사했다. 이로써 경남도당의 조직적인 투쟁은 막을 내렸다. 남

부군은 이미 사라진 뒤의 얘기다.      

 

★ '빨치산의 딸' 1부는 작가 정지아의 아버지 정운창의 고향 구례군 문척면 반내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아버지 유혁운(본명 정운창)이 구례구역 역무원으로 시작하여 부모의 강제결혼, 이후 빨치산 활동과 위장 자수, 검거, 전향하는 과정의 이야기였고,

 

2부는 남부군의 정치지도원 이옥자(본명 이옥남)의 출생과 결혼, 남편의 뜻을 따라 빨치산이 되었고 남부군 정치지도원이 되어 칠 년간의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끝내는 지리산 조개골 환자트에서 같이 지내던 4명 중 한 사람인 이북 출신 시인 이명재의 배신으로 검거되는 과정을 그렸는데

 

정지아의 부모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빨치산 활동을 하기 이전에 각각 결혼을 한 상태에서 이후에 정지아의 부모가 된 과정은 소설에서 밝히지 않았다.

 

빨치산의 딸 작가 정지아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글은 부모님의 개인적 체험에 의거한 것이고, 이미 사십 년 전의 일

이라 기억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어머니는 몇 번의 대수술로 

기억력이 매우 쇠퇴하여 다른 분들의 증언을 참조로 했지만 워낙 오래전

의 일이라 전투가 있었던 지명이나 수많은 전투들은 모두 정확하게 알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증언에 의

거했다. 구호 하나, 사용하는 단어 하나라도 당시의 용법대로 쓰려고 노

력했다. 작은 오류가 있더라도 양해 바란다. 해방 후의 한국 현대사에 대

한 연구는 이제 비로소 걸음마 단계에 있다. 이 책이 당시 혼돈의 역사를 

해명하고 새로운 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미약한 보탬이라도 되기를 바란

다. 

                                                                       1990년 12월 정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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