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2.08.10(수)

버팀목2 2022. 8. 10. 10:23

2022.08.10(수) 흐림

 

 

기억에서 사라질까 봐서 내가 읽었던 빨치산 수기 남부군을 필사해 본다.

기억력을 되살리고 가끔씩 반추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다.

 

 

남   부   군

최초로 공개된 지리산 빨치산 수기

이 태  지음

 

이태(李泰)

본명 이우태(李愚兌)  1922~1997

충북 제천(옛 중원군) 출신

국학대학(고려대학교 흡수된 우석대학 전신) 국문과(3년)와 조선신문학원(1년) 졸업

1948 서울신문 기자 시험 수석 합격(400명 응시 3명 합격)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로 8개월 종사 후 편집부국장 전홍진을 따라 '합동통신'으로 이직 사회부 기자 생활

 

한국전쟁 발발

1950. 6.29 인민군이 서울 입성한 날 평양 조선중앙통신사에 의해 서울의 3개 통신사(합동, 고려, 공립) 흡수되어

'여자 의용군 위생대' 종군기자가 되어 전주로 내려가 통신업무를 맡다.

 

1950.09.20 군산 앞바다 오식도에 연합군 상륙하면서 전주지사 기자들은 전북도당 간부들을 따라 전북 순창 구림면 무명 골짜기에 들어간다.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 사령부' 대원이 되는데 그 해 추석이 이 책(남부군)의 시작이다.

 

그 후 회문산 '독수리부대'를 거쳐 남한 빨치산의 상징적 존재인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되어 17월을 보냈다.

 

1953.03.19.05:50경 분대에서 낙오되어 닷새를 굶은 끝에 지리산 기슭 덕산에서 체포되었고,

 

단성 지서 유치장에 수감 중 당시 토벌대 경찰사령관(경무관) 청주중학교 동기 이성우와 운명적 만남 덕분에 남원 수용소에서 6개월 후 석방. 남원경찰서에서 도민증 취득.

 

수소문 끝에 서울 용두동에서 부모와 상봉하고 군 입대하였으나 체력 저하로 한 달 만에 귀향조치

아버지와 연탄가게 운영.

 

이후 연탄회사 번개탄 원료인 숯가루를 납품하다가 대동연탄 과장이 되어 재직 중 사주 정해영(후에 국회부의장)의 세계일주 여행기를 대필하여 조선일보에 10일간 연재했던 이 여행기가 반응이 좋아 1957년부터 국회의원 정해영의 스피치 라이터로 일했고,

 

신민당 당수 윤보선의 글을 써주는 일도 했다. 

 

1963년 6대 국회의원 당선 3년간 정치활동.

 

1975. 05 교통사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남부군' 쓰기 시작

 

군사정권의 정치활동 규제로 공식적인 모임을 갖기 어려워지자 

1981.06.09 편법으로 등산모임인 '민주산악회'를 만들어 총 산악대장과 부회장을 맡았고 민주화운동 집회 참가했다.

민주산악회 창설부터 헌장, 노래도 그가 지었고 매주 목요일 길잡이로 산행을 이어갔다.

 

1988.08.11 '남부군' 출간되어 50만 부 이상 판매 베스트셀러

1990년 정지영 감독 영화 <남부군>

1997.03.06 별세

 

저서로는

<한글 공문 편람 1995>

<이현상 1990>

<기다림 1990>

<여순 병란 1994>

<천왕봉 1994>

<유고시집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 1997>

 

- 남부군의 종말 -

 

1953.07.27 휴전협정 체결 남한 잔존 공비 1,388명 추계.

 

휴전협정 마지막 단계에서 유엔군 측은 남한 게릴라 안전 철수를 제의했으나 평양 측은 묵살했고

산을 내려와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지령을 하달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남한 땅에서 그냥 죽어라는 뜻이었다.

 

▣ 이현상

    1905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전주 이 씨 진사 이면배(李勉培)의 4남으로 출생

고창 고보를 거쳐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 후 중퇴하고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

 

1925년 박헌영 밑에서 김상룡 등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 공청(共靑)의 핵심으로 부상

1928년 조공당(별칭 ML당)이 일본 경찰의 발본색원적 탄압으로 붕괴 소멸되고,

박헌영을 정점으로 이관술, 권오직 등과 함께 '경성 코뮤니스트 클럽' 만들다.

 

해방과 함께 조공당 재건에 참여 남로당으로 개편된 후 간부부장 요직에 올랐다.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비 합법화되자 월북 도피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 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

48년 11월 지리산 입산 5년 후 지리산 빗점골에서 남한 빨치산 궤멸의 책임을 똘똘 뒤집어쓰고 평당원으로 격하된 채 의문의 죽음을 당하여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친다.

 

북한 정권은 1955.02.05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 

 

1953.09.03 경찰 2 연대 매복조는 구례군 토지면 섬진강가에서 5 지구당 기요과 부 과장 안과의사 이형련 29세를 생포하여 그로부터 이현상 소재 파악을 어렴풋이 알아냈고,

 

동년 09.06 이현상 호위병 김은석, 김진영을 체포 이현상 은신처 파악

이현상이 박영발 등에 의해 무장 해제되고 지위 박탈당한 채 감금 중이라는 정보 입수.

 

09.17~18 군경 18,000명 의신마을 위 빗점골 2~3중 포위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소속 국군 56 연대 수색대, 혹은 서전사 소속 경찰 2 연대 김용식 수색조에 의해 이현상은 쓰러졌다.

 

사살은 많은 수수께끼를 남긴 채 그의 시체는 화개장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되고 그 재는 강물에 뿌려졌다.

향년 51세 유류품은 서울 창경원에 공개 전시됐다.

 

그가 남긴 수첩에 한시 몇 수 적혀 있었다.

 

지리산에 풍운이 일고 기러기떼(군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하니

검을 품고 천리길을 달려 내려왔노라.

내 생전 고국을 생각지 아니한 날 없고

삼엄한 군기 속에 동지들 한 곳에 모여 있네. 

  

평양 당국은 후일 이현상을 '열사묘'에 안치하고 평양 체류 중인 아내 최성녀와 아들 극(剋) 후대했다.

 

※ 황석영의 북한방문기에도 혁명열사능과 애국열사능을 거론하며 액구열사능에서 이현상, 방준표의 묘비 목격담 있었음.

 

 

09.21 남원군 아영에서 경찰 토벌대는 전 5 지구당 유격 지도부 부부장 문남호 27세[본명 오복덕(嗚福德) 경북 경산 출신 47.02.07 항쟁 야산대 활동 구빨치] 생포

5 지구당 내분의 진상을 알리는 2건의 문건 압수

서전사 사령관 김종원 초교 동창 인연으로 방면 귀향했으나 곧 사망.

 

조선노동당 제5 지구당 결정서 제9호(53.08.26)

    박헌영, 이승엽 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청소하기 위한 대책

 

반당, 반국가, 파괴, 암해, 종파분자인 박헌영, 이승엽 일당은 자기들의 반역적 파과 공작의 일환으로 50년 11월 9일 강원도 후평에서 이현상에게 남한 빨치산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여운철에게는 정치적으로 장악할 것을 지령해 내려보냈다. 이현상은 이 지령에 의해 남한 빨치산의 총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금껏 불합리한 조직운영을 해서 각 도당과 단체들을 사상적, 조직적, 전투적으로 혼란, 약화시켜 왔으며, 특히 전북 · 경남 유격대를 거의 모조리 파괴했으며, 경남도당의 수뇌부를 남김없이 전몰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 반역도당들의 잔재와 영향을 일소하는 중앙당 방침에 호응해서 제5 지구당의 조직적, 사상적 정리를 53년 9월 10일까지 마칠 것을 이현상에게 책임 지운다.

 

이러한 9호 결정서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조치가 10호 결정서로 취해진다.

 

조선노동당 제5 지구당 결정서 제10호(53.9.6)

 

1. 박영발의 보고서에 의해 9월 6일 자로 5 지구당을 해체한다.

2. 5 지구당 요원과 김지회 부대 대원을 구례 군당, 남원 군당, 경남도당에 각각 분산 배치한다.

3. 조국 출판사를 조직해서 박영발, 송영회가 운영을 책임진다.

 

4. 5 지구당 잔무정리 및 재정 비품 일체를 박영발이 인수한다.

5. 송수신기의 설비와 전원에 대한 구입 보장을 조병하와 이현상이 책임진다.

6. 5 지구당의 문서 일체와 비장은 기요 과장 김회준이 책임진다.

 

7. 김지회 부대는 구례 군당의 당적 지도를 받으며 그 명칭은 995부대(북한 정권 수립일 9월 9일 5주년 기념)로 바꾼다.(이상)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남부군의 후평 반전이 남로당계의 돌출적인 조치였으며, 송치골 6개 도당 회의에서 박영발, 방준표 등이 이현상에 반발한 것이 단순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아니라 김일성 파와 박헌영 파의 줄다리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엽의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라는 직함도 전혀 비공식이었다는 것이 그 후의 북한 문건에 의해 명백해졌다. 결국 이현상은 남한 빨치산 궤멸의 책임을 똘똘 뒤집어쓰고 평당원으로 격하된 채 빗점골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53.9.18) 

 

이 무렵 총원 50여 명으로 줄어든 김지회 부대는 구례 군당 휘하로 들어가지만 남부군의 마지막 지휘자 김태규는 10여 명 남은 병력(대부분 여성)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고 만다.

 

김지회부대장 김흥복의 죽음은 '영웅칭호를 받은 김흥복도 사살'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그 소상한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이렇게 해서 이현상도 가고, 그가 사랑하던 남부군도 사라졌다.

 

이현상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평가가 있다.

 

대체로 해방 이후 부상한 기본 계급 출신이 엘리트 당원들과 지역적으로 그들 영향 하에 있던 전라남북도 대원들, 14 연대 출신 군사 간부와 제2병단 시절부터의 구빨치, 콤 클럽 이래의 동지들과 그 영향 하에 있던 경남북, 충남북 대원들은 이현상에게 매우 충실했고 그를 흠모했다.

 

필자는 연전에 대성골을 거쳐 세석평전에 오르는 산행을 하면서 지금은 취락 개선사업으로 전혀 모습이 달라진 의신 마을에서 하룻밤 민박을 한 적이 있다.

 

빗점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의신 마을이지만 기록에 나오는 '갈매기봉'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전사에 나오는 갈매기봉은 어디일까? 그러나 놀라운 일로는 민박집 주인인 초로의 내외는 이현상에 관해 아주 소상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2십 리쯤 되는 면 소재지 화개장 밖으로는 일생 동안 나가본 적이 없다는 최 씨라는 그 촌로 내외는 영지버섯으로 담갔다는 약주를 권하면서 사변 당시의 회고담을 이렇게 말해주었다.

 

"토벌대의 소개 명령으로 마을이 소각됐지요.

그러나 산전(山田)이나 붙여 먹던 우리가 가면 어딜 갑니까? 얼마 후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초막을 짓고 사는데 다시 소각 명령이 나서 또 마을을 떠나야 했지요. 두 번 불탄 셈이지요."

 

"빨치산들이 들어왔을 텐데 그땐 어땠어요?"

 

"어쩌다 산사람들이 들어와 감자나 수수 같은 것을 거둬갔지만 그밖에 별 해코지는 안 했어요. 한 번은 그게 가을 무렵인데, 뒷산에서 산사람들 습격을 받아 토벌대가 13명이 죽고 5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포로로 잡힌 토벌 대원들이 발가벗긴 채 늘어서 있는 것을 봤지요."

(그것은 51년 9월 말경 남부군의 서남부 지리산 주변 작전 때의 일로 그 촌로의 기억이 너무나 정확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현상이라는 아주 높은 빨치산 대상이 있었는데 나도 한 번 악수를 한 적이 있어요" 주인 아주머니의 얘기다.

 

"무섭지 않았어요?"

 

"그땐 열여섯 살 때니까 어려서 무서운지 어쩐지 몰랐어요 그냥 사람 좋은 아저씨 같았어요"

 

"시중드는 여자는 없었나요?"

 

"그런 여자는 없었고 아주 잘생긴 남자 호위병이 꼭 붙어 다녔는데 음식물을 주면 그 호위병이 반드시 먼저 먹어보고 나서 얼마 후에야 이현상에게 갖다 받치곤 하더군요."

 

"그 이현상이 빗점골 어디선가 사살됐다고 하던데요?"

 

"예 빗점골 합수내 근처의 절터골 돌밭 어귀에서 맞아 죽었다더군요. 그 근처에 가면 지금도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사람들이 잘 안 가지요."

 

영감이 핀잔을 줬다

"귀신은 무슨 귀신······· 

거기가 워낙 험한 곳이 돼서 자칫하면 길을 잃고 큰 고생을 하니까 사람들이 범접하지 않는 거지."

 

사실 빗점골에서 주능선인 토끼봉으로 오르는 루트는 지금도 등산로도 나 있지 않은 전인미답의 비경이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이던 '공화국 영웅' 이현상은 그곳에서 그 전설적 생애를 마친 것이다.

 

뒤이어 11월 28일 전 57 사단장 이영회가 대원 62명과 같이 지리산 상봉골에서 전경 2 연대 수색대와 교전하다 이영회는 전사하고 이영회가 인솔하던 경남 대원은 궤멸한다(공비토벌사).

 

이것이 빨치산 편제 부대와의 마지막 교전 기록이다.

 

한편 '상봉골'에서 50킬로미터나 떨어진 만복대 기슭 시암재에 이영회를 사살한 곳이라는 전공 기념 표지판이 서 있었다. 이영회의 전사도 많은 이설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의 기억이다.

 

오랫동안 이영회 휘하에 있던 정순덕은 이영회가 28명의 대원을 이끌고 의령경찰서를 습격해 경찰서를 한때 완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고 나서 지리산으로 철수하다가, 11월 27일 산청군 신등면 사정리에서 경찰 5 연대 매복조와 조우, 격렬한  전투 끝에 전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영회부대도 전사 9명, 생포 4명의 타격을 입고 이때 궤멸되고 만다. 이때 이영회의 나이 26세.

 

▣ 이영회

19세 때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광주 4 연대에서 야포를 담당하다가 여수 14 연대로 전속된 후 반란사건을 맞게 되어 사병 계급이면서 중대를 이끌고 반란에 가담, 지리산에 입산한 후 49년 7월 인민유격대 제2병단이 편성될 때 5 연대장이 된다. 이현상과는 이때부터 인연이 시작된다.

 

이영회에게는 이옥순이라는 이름의 두어 살 아래 애인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비판하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 내 나이 스물에 입산해서 풍찬노숙, 사람답게 살아본 날이 하루도 없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다 죽을 것이 뻔하다. 내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서로 사랑한 한 사람의 여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라며 그 답지 않은 감상을 토로하더라고 한다. '유격전의 귀신'이라는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며 젊은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쯤 후인 54년 1월 6일 남경우 사망 후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전임되어 있던 조병하(曺秉夏 전 전북도당 부위원장)가 국군 5사단 토벌대에 의해 지리산 조개골에서 생포된다.

 

그는 함경북도 명천의 빈농 출신으로 사변 전 노동당 함북도당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50년 여름 전북으로 파견돼 처음엔 도 인민위원장으로 있다가 도당 부위원장이 되어 방준표 밑에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를 생포한 국군 부대장이 같은 고향의 지주 아들이며 소꿉친구였던 한신(후에 장군이 되었음) 이어서 구명을 위해 전향을 권고받았으나  끝내 총살형.

 

▣ 남도부[南道釜 본명 하준수(河俊洙) 함양 태생]

경남 유격대를 상징하던 이영회의 죽음과 함께 지리산 주변, 아니 남한 전역의 유력한 빨치산 편제 부대는 자취를 감췄다.

일부 빨치산 간부는 북의 지령대로 변복하고  지방도시에 숨어들었으나 '지하당 공작'은 엄두도 못 내고 '망실 공비'라는 이름 밑에 전투경찰이 아니 정보경찰의 수배대상이 돼서 남김없이 소탕됐다.

 

54년 1월 15일 그중 한 사람인 제4지구당 군사부장 남도부가 부하 4명과 대구 시내에서 체포됐다 당시 34세 청년이었다.

 

남도부는 진주 중학을  중퇴하고 일본 대학에 진학했는데 가라데 6단으로 대학의 주장 선수였다.

 

대구 10월 항쟁에 관계하고 덕유산에 도피, 48년 8월 해주 인민 대표자회의에 참석차 월북했다가 김달삼의 제3병단 부사령으로 남하 침투했다.

 

6.25 때는 인민군 소장의 계급(후에 중장)을 가지고 제7군단 유격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사뭇 동해지구 빨치산의 리더로 활약했다. 

 

사형대의 이슬이 되어 최후를 마쳤다.

 

▣ 김삼홍[金三洪, 본명은 김병인(金炳仁]

경남도당 부위원장도 이 무렵 하산해서 부산으로 침투했다가 검거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 보호감호처분으로 계속 구금되어 34년의 옥살이 끝에 89년 초에 출옥하여 2월 26일 병사한다.

향년 72세. 하동의 삼 천석꾼 지주의 아들로 일본 명문 와세다 대학 출신이다.

 

▣방준표

54년 1월 31일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국군 제5사단 36 연대 정창호 중위의 수색대에 의해 남덕유산 1,046 고지에서 애인 신단순 등과 함께 사살돼 전북 유격대는 완전 섬멸된다.

 

방준표가 지녔던 문서에서 그가 거제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는데, 방준표는 대구사범을 나와 대구철도국에서 근무하다 10월 항쟁 때 연루되어 월북 후 모스크바 당학교를 수료한 신 인텔리로 원칙만을 고수하는 경직된 공산주의자였다.

 

신단순은 경남 태생으로 모 경찰국장의 딸이, 전북 이리 태생으로 모 여고 2학년의 학생,

 

가장 믿을 만한 정보는 부안의 빈농의 딸로 간호원 양성소를 나온 간호보조원이었다는 것이다.

북에서는 '소녀 빨치산 영웅' '공화국 영웅'의 최고 영예를 얻었다

 

▣ 박영발

경북 봉화 태생으로 학력이 전무한 대신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던 토목 노동자 출신.

 

54년 1월 중에 전 전남도당 위원장이며 5 지구당 부위원장 박영발은 배암사골에서 최후를 마쳤다.

 

그 무렵 전남도당 위원장은 부위원장이며 6.25 전 전남도책이던 김선우가 맡고, 박영발은 10호 결정서에 의해 배암사골에 설치한 '조국 출판사'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토벌대에 포위되자 탈출을 단념하고 권총으로 자결해버렸다.

 

▣ 김선우

뒤이어 2월 27일 6.25 전 전남도당책이었고, 사변 후 전남도당 부위원장과 전남 유격대장을 겸하던 김선우가 광양 백운산에서 토벌대와 교전 끝에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그의 아지트에는 그가 탐독하던 서책이 그득한 것을 본 토벌대의 연대장이 정중한 장례를 치러주고 묘까지 만들어준 고무사(古武士) 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빨치산이나 투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선비형의 사나이였다.

 

▣오금일

김선우 밑에서 유격대의 부사령으로 있던 오금일도 김선우 사망 직후 통명산에서 부상하고 포로가 되는데, 연행 직전에 자결하여 결국 전남도당 수뇌부도 54년 2월 섬멸되고 만다.

 

1953년 12월 1일부터 전개한 국군 5사단(사단장 박병권 준장)의 겨울철 토벌작전도 이렇게 해서 2월 중에 종료한다.

 

그 후에도 어쩌다 은신 중인 '망실 공비'가 하나둘씩 체포된 예는 있으나 그것은 이미 '빨치산 투쟁'은 아니었다. 결국 남한 빨치산의 처절했던 역사도 이 2월로써 끝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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