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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癸卯年) 마지막 산행을 지리산 천왕봉에서

버팀목2 2024. 2. 14. 12:25

계묘년(癸卯年) 마지막 산행을 지리산 천왕봉에서

                                                                        김  

 

2023년 마지막 날, 오랜만에 지리산 천왕봉(1,950m)을 오르기로 했다. 천왕봉을 오르는 중산리~칼바위~망바위~천왕봉(5.4km) 코스는 최단코스인 만큼 급경사이다. 산을 자주 오른다 해도 약간의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쉬운 코스인 중산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자연학습원 입구(3.0km)까지 가서 거기서 로터리 대피소(자연학습원~로터리대피소)로 올라가면 안전하고 수월하다. 나름 그 코스를 머릿속에 그리며 갔다.

문제는 천왕봉 산행을 제안한 구대장은 분명 칼바위 코스로 작정하고 있을 터이다. 원래 그 코스가 자기 스타일에 딱 맞다며 그리로 가자고 할 것이 분명하니 셔틀버스를 탈 구실을 생각해 보았다.

오전 6시 30분 무전동에 있는 24시 콩나물국밥집에서 만나 조식을 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 20분 앞당겨 집을 나섰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동짓달 열여드레 하현달이 길을 비춰주었다.

약속장소에서 동행할 박태도 씨를 만나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히말라야 트레킹에 대장으로 동행했던 김종진 씨가 콩나물국밥을 먹고 있었다.

박 선생은 산행하는 날에는 집사람이 어떤 일이 있어도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차려준다며 은근슬쩍 아내 자랑을 했다. 지인 중에는 건넌방에서 자는 아내가 깰까 봐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집을 빠져나온다고 한다. 나는 잠이 깨자마자 밥을 먹을 수가 없어 아내에게 잘 다녀오마고 인사만 건네고 집을 나선다. 장거리 산행에서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편이다.

조금 후에 도착한 구대장도 콩나물국밥을 주문해서 같이 식사했다. 오늘 산행 참여 인원은 셋이라 했다. 같이 가기로 했던 한 명은 사정이 생겨 못 온다는 것이다.

7시에 통영에서 출발해서 중산리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플래카드에 중산리 국립공원 주차장 내부 공사로 차량 출입을 통제한다고 되어 있었다. 아스팔트 포장길로 1km를 오르막길로 걸어서 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며 2~300m를 차를 타고 올라가니 국립공원 직원이 나와서 신호봉을 들고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통제소 옆에 약간의 공간이 있어 그곳에 주차하고 도보로 이동하면서 일행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녁에 딸내미 가족과 연말 식사 모임이 있다며, 산행 시간을 단축하자고 했다. 마침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 셔틀버스를 타고 자연학습원 종점에서 내렸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비구니 여섯 분이 올라가고 있었다. 법계사에 가는 스님들이라고 여겼는데 법계사를 지나쳐 천왕봉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스님들의 차림새가 천차만별이었다. 등산용품점에서 파는 스틱을 짚고 가는가 하면 나무작대기를 짚고 가기도 하고, 아이젠도 2구짜리 또는 4구짜리 각양각색이었다. 고급 승복을 입은 스님과 낡은 목도리를 둘둘 목에 감고 있는 스님도 있었다. 내 생각엔 속가에서 재정지원을 받거나 재산을 가지고 출가한 스님과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로터리대피소에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데 박태도 씨가 20년 전 이곳 화장실에서 내가 카메라 빠뜨린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생일선물로 딸아이가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캐논 디지털카메라를 목돈을 들여 사주었다. 산행 시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했는데, 화장실에서 방한복 상의에서 휴지를 꺼내다가 그만 카메라를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린 것이다. 겨울이라서 변소 안이 얼어있어 카메라가 모로 꽂혀 있었다. 상의를 벗어 화장실 문에 걸어 두고 뛰어가서 스틱을 가져와서 다행히 건졌다. 물티슈로 몇 번씩 닦아서 수년간을 더 사용하다가 고장이 났다. 제품이 단종되어 쓰지는 못해 몇 해를 애지중지하던 물건이라 지금껏 보관하고 있다.

로터리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2km. 급경사 오르막으로 제일 힘든 구간이다. 개선문을 지나고 천왕샘 못미처 마지막 쉼터에 당도했다. 그 장소가 수년 전 부상자를 수송하러 갔던 119 구조대 헬기가 구조 중에 추락한 곳이다. 그날 사고로 부러진 구상나무가 고사목 되어 등산객들에게 조심하라며 무언의 속삭임을 주는 듯했다.

그 너머 촛대봉이 눈에 들어왔다. 내 젊은 날 지리산 종주 산행(성삼재~천왕봉~중산리 34km)을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저기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어져 있었다. 다리는 천근만근인데 장터목 대피소 지나 천왕봉은 까마득히 멀어 보였다. ‘눈은 게으르고 다리는 부지런하다’라며 우리를 스쳐 지나간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던 그 날들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오늘은 겨울 날씨치고는 천왕봉 가는 길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남강 발원지 천왕샘 바위틈새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샘물을 한 바가지 떠서 목을 축였다. 천왕봉 오르는 마지막 철계단 35계단을 지나 나무계단 110계단도 세어가면서 올라갔다. 먼 훗날 언젠가 천왕봉 등반하던 이 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1,915m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에서 인증사진도 찍고, 올랐던 길로 되돌아오면서 쉼터에서 스마트폰을 열어 블로그에 적혀있는 지리산 산행기를 꺼내 보았더니 벌써 50회나 되었다 지리산 둘레길 22구간을 걸으면서 적었던 지리산 둘레길 산행기 19회까지 합치면 지리산 이야기는 69회 차를 기록한 셈이다.

하산하면서 로터리대피소에 잠시 들렀는데, 둘이서 망바위를 거쳐 칼바위 쪽으로 하산하자고 한다. 급경사로 3.4km를 내려가야 하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구간이다. 산악사고는 대부분 하산 시에 발생하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 자칫 상처를 입기 일쑤다. 산행이 종료되고 나니 중산리에는 비가 내리고 뒤돌아본 천왕봉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사히 7시간에 걸쳐 중산리까지 산행을 마치고 나니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통영에 도착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 없이 가족 식사를 하라고 당부했다.

셋이 식당으로 가서 생갈비 5대와 소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2023년 계묘년 마지막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아직 천왕봉을 오를 수 있는 체력과 용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송년회를 겸한 식사를 했다.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계속 등반을 할 것이다. 새해에는 육신의 건강뿐 아니라. 마음의 양식도 섭취해야겠다. 틈틈이 독서하고 글을 쓰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양미경 선생님 첨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