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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想

버팀목2 2009. 5. 29. 17:46

 

  回 想 

 

내 나이열두살 되던

음력 이월 열 여셋날 새벽에

 예순일곱의 나이로 아버님이 운명 하셨다

봄비가 촉촉히 내리던 새벽녁 아버님의 운명을 지켜보던 가족들의 곡소리에

 난 작은방 이불속에서 아버님 곁으로 달려갈 용기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굳이 슬픔이라기보다는

가족들의 슬픈 울음소리에 뇌동되어

이불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훌쩍거리고 있었다

 

잠시후 어머님이 저를 불러

개울 건너 살고 있는 작은아버지(이하삼촌)에게 가서

아버님의 운명을 알리고 시신 안치방법 등 장례절차에 대해

물어 오시라고 하셨고

 

저는 담담히 그 사실을 삼촌께 알리고 답을 얻어 돌아 왔으며

그렇게 장례식은 진행되어 갔다

 

아들없이 두딸만 낳은 삼촌은 절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숙모님이 백일기도중 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형님 장례식에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참석하지 않은 속내는

나중에 내가 좀더 자라서

알게 되었지만 따로 이유가 있었다(여기서는굳이 밝히지 않겠음)

 

발인제가 있던 날 제례행사가 끝나면

 차려진 재물은 발인제에 모인 마을 주민들에게 접대하게 돼 있다

 

제례상에 올랐던 백설기 떡을 잘라 구경나온 어린애들에게 나눠주는데

소견머리 없는 내 놈이 그 떡을 받기 위해 여느 아이들 틈에 끼여 줄을 섰던

 치욕적인 기억이 있다

 

이게 두고두고 내와 나이차가 많은 형제들간에 회자되어

아버님 기일에는 감초마냥 단골매뉴로 올랐는데 그럴때마다

난 수치심으로 온 뭄을 부르르  떨곤 했다

 

장례식때 큰형님이 선원으로 출항중에 있어 

장례식이 끝나고 도착한 관계로

 맏상주 노릇을 한 작은형은

늘 자랑삼아 그 이야기를 하곤 했고

내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부턴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 말을 삼갔지만....

 

 솔직히 그땐 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별로 슬퍼지도 안았고

 남의 집 초상처럼 여겨 졌었으며 아버님이 해수병을 앓고 계시던터라

아침마다 해수통(가래를 밷는깡통)을  잿간에다 비우지 아니해도 된다는

홀가분만 마음만 내 기억에 남았다...

 

떡을 받기 위해 줄을 섰던 기억은 해를 거듭할수록

새롭게 세롭게 내머리에 각인되어 아버님 제삿날이 다가오면

수치심으로 내 온몸을 닭살 오르게 만들곤 했다

 

 2009. 5.12 난 요추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 부산우리들병원에 입원을 했다

형제간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13일날 수술을 끝네고

회복기에 있으면서 병원이 있는 온천동 인근에 살고 계시는

이른여섯살의 큰 누님 생각이 났다

 

한참을 망설였다

 훗날 인근병원에서 수술받은 사실을 알게되는 날

 누님으로부터 원성을 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로인해 다른형제간들도 모두 알게 되었지만...

 

 

부산에서 두곳의 병원을 오가며 두차례의 수술(디스크,치질)을

받는 동안 누님이 노구를 이끌고 전북죽이며 식사와 토마토쥬스 등을

손수 만들어 병원으로 가져왔다 그러던중 집사람이 목욕을 간 사이

누님과 공감대를 갖는 부분에 대해 많은 애기를 나누게 되었다

 

큰자형이 큰아들을 낳고 이태후 처가에 오니

 장모님이 막내아들을 낳았더라 등...

 

이야기 중간에 처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왔고

동석한 자리에서 아버님 장례식날

발인제 이야기가 양념으로 또 나왔다

 

이젠 그럴때마다 내스스로가 12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린나이에 소견머리가 없어 한 행동 이었는데 무슨 부끄러움이냐고

 스스로 위안하고 살련다 ...    

 

 

2009. 5. 18. 잠이 오지 않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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