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3.06.24(토)

버팀목2 2023. 6. 24. 11:07

2023.06.24(토) 흐림

 

 

☆ 여름, 그 어느 날의 그리움이 밤을 새워 하얀 입김으로 보낸 오래된 시간은

 

꿈처럼

혼자 깨어 있는 그 설렘 안에 분홍색들이

봄으로 그려놓은 아름다운 숲 속을

가고 있는 사과나무처럼

가을이 되지 않아도 달콤하게 신맛이 나는 눈빛으로

어떤 날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고운 소리를 가진 그 외로움을 말합니다

 

바람의 마음이 되어 한마디 말도 없어

빗소리로 사락사락 걸어

노을의 단맛이 없는 대문 앞에 도착하게 되면

 

숲 속의 고요함이 나뭇잎들의 음악을 들려주려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깨어지지 않도록

노래의 가방에 살며시 들어 있는 꿈은 그리움이 됩니다

 

숲이라는 알아야 하는 처음이라는 애태움

그 아름다움의 의미를 꺼내려면

그리움의 높음과 낮음에서 기다림을 배우고

 

부족한 것을

꿈의 기도로 채워지는 안개꽃의 하얀 시간은

언제나, 나무로 알아가는 시련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별들이 그려낸 실로폰의 삼각형은

미움을 살며시 밀쳐내고 공교하고

따뜻한 아침 햇살이 눈물과 대칭을 이루도록

서로의 간결함을 덧입혀

꽃잎들은 노래의 외투를 마음 한 켠에 걸어 둡니다

 

☆* 달이 별빛을 사랑하는 날 * 중에서 / 정 세 일 글

 

 

♤ 에    필    로    그

 

살다 보니

혼밥, 혼술에 외로움도 익숙해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보고 싶고 미치고 외로워질 때는

날 기억해 주는 사람이 그립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전화 한 통화, 문자 한 줄이면

그리움도 봄날 눈 녹듯이 스멀스멀 사라진다

 

하지만

따뜻한 만남은 자꾸자꾸 멀어져 가고

외로움은 더욱더 가슴속을 후비고 든다

 

☆ 외 로 움 / 백 재 성

 

☆* 시 전 집 * 중에서 ♡

 

 

부르고회 모임이 청도소갈비 식당에서 있었다.

회원 15명으로 출발해서 3명이 탈회했다.

그 중에서 3명이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

 

 

 

 

김덕홍 회고록 필사(P331 스승 김종선 선생의 충고)

 

2001년 10월 말경 나는 서울 상일여자고등학교 이사장 김종성선생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 당시 선생은 90세를 넘긴 연세셨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종성선생은 내가 대한민국 망명 후, 제일 존경하는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시다.

 

김종성선생은 평북도 박천출신이시다. 언젠가 선생은 내게 1945년 8.15 해방 직후 김일성을 찾아가서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중략~

 

김종성선생은 반세기 훨씬 더 지난 그 시절을 근년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공산당과는 절대로 한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어. 그게 김일성을 1년 경험하고 얻은 진리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선생은 늦가을의 마지막 잎들이 흐느적거리는 자택 정원에서 나를 맞았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선생이 먼저 내게 물으셨다.

 

  "요즘 신문들에 나오는 것을 보니까 , 황장엽이 미국에 안 가겠다고 한다는데, 미국에 안 갈 바에는, 왜 가족들을 죽이면서까지 망명을 했노?"

 

나는 그 물음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너무 부끄럽고 송구해서 입이 열리질 않았다. 나의 고뇌와 안타까움을 헤아렸는지, 선생은 내 손을 찾아서 꼭 쥐고 말씀을 이었다.

 

   "김덕홍선생,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는지 아는가? 황장엽과 김정일은 사상이 꼭 같다는 걸 말해주려고 불렀어. 황장엽은 김정일과 개인감정 때문에 망명했지, 북한문제를 해결하려고 온 사람이 아니야. 이걸 말해주려고 당신을 불렀어. 내 말을 새겨듣고 황장엽이 미국에 안 간다고 해도 김 선생만은 꼭 가야만 해."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몇 년 몇 달을 두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문제의 본질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왜 나는 북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망명했음에도, 사사로운 감정에 젖어서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대처했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괴롭고 쓰라린 후회가 마음을 후비고 또 후볐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결국 나는 "네가 같이 가지 않으면 정치망명 안 한다."는 황장엽비서의 굳건한 고집과 황장엽을 김정일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당내 지기들의 의기투합, 그리고 조선(造船)한 사람이 폐선(廢船)도 해야 한다는 동지들의 신념과 그 위에 '유약한 글쟁이 형님이 남쪽에 나가서 혹 미미하게나마 무시와 멸시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내 소박한 인정까지 얹혀서 정치망명 동행을 결심하고 단행했던 그 초지를 지켜내지 못하고 황장엽형님과 결별하게 되었다.       

 

  2003년 여름 미국신문 윌스트리트저널은 북한 관련 기사에서 '주체사상이 김덕홍과 황장엽을 결별시켰다'라고 서술했다. 그렇다. 나는 주체사상 때문에 황장엽형님과 결별했다.   

 

지금에야 이해되는 황장엽, 그리고 그리움

 

내가 황장엽선생의 정치망명을 준비하면서 의형제를 맺고 형님으로 모셨던 그분은 정치망명자이기 이전에, 사회주의사상 이론가이고 사회주의철학자였다. 

 

2000년대 중반에 나는, 구소련 및 동구권사회주의의 붕괴 당시 그곳에서 활동했던 외국기관의 심리학전문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해 줬었다.

 

  " 구소련과 동구권이 자본주의로 복귀할 때, 정치인들과는 달리 사회주의사상이론가들은 마지막까지 전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은 곧 신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사상전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사상의 어느 구석에도 공산지도자가 독재를 해도 된다는 말은  없었다면서, 특히 사회주의권 독재자들을 누구보다도 증오하고 거세게 항거했습니다. 사회주의권에 유독 정치범이 많았던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당시 참여정부의 부당한 대우와 압력 때문에 매일 매 시각 초긴장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 범주에 황장엽형님이 포함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김일성족속의 통치철학인 주체사상을 증오하는 만큼, 인간중심철학에 집착하는 형님에 대해서도 늘 불만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형님이 사망한 뒤, 한 해 한 해 그 나이 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에서의  형님의 처절한 삶과 심정이 다소나마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한국에 망명한 지 2년이 지나가던 1999년 여름, 나는 당시 약 1년간 형님에게서 인간중심철학을 강의받다가 다른 곳으로 간 30대 연구원(한국인)을 만나 기회에 이렇게 물었었다.

"왜 황장엽선생의 철학 강의를 받다가 도중에 그만두었습니까"?

내 질문을 받은 그는 아주 담담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장엽선생님의 깊은 학식은 존경하지만, 그러나 그분의 사상은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그걸 가지고 어데 가서 밥벌이를 못합니다."

 

정말로 정치망명 초기에 형님에게서 인간중심철학  관련 강의를 받던 한국의 여러 젊은 철학자들이 대개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형님의 곁을 떠나갔다. 형님이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회주의사상이론가, 사회주의철학자로서 60년대 말부터 나름 인류의 이상향을 그려보며 열정과 심혈을 깡그리 바쳐 연구하고 완성해 온 인간중심철학(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라고 부름)에 대해 어찌 조바심이 나지 않았겠는가. 김일성족속이 빼앗아서 저들의 통치철학으로 삼았건, 형님이 김일성족속에게 바쳤건 관계없이 인간중심철학은 형님의 분신이었다.

 

그리고 형님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의 사상과 이념을 전향하기가 거의 쉽지 않은 76세에 대한민국에 정치망명을 했다. 아울러 소위 '사회주의 배신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사면포위' 속에 있는 김일성공산왕조의 권력중심→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사상 및 외교 담당 비서로 사업한 노련하고 원숙한 형님은 이미 6자 회담이 어떻게 전개되든, 미국 등 국제사회가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이슈화하든 북한체제의 붕괴는 요원한 일이라고 바라봤던 것이다.

 

이와 같은 주객관적 이유들로 인해서 형님은 인각적으로도 유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까지 북한문제와 국가정보원의 부당한 압력에 한해서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형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사사건건 "이러면 안 됩니다", "저러면 안 됩니다" 했으니 그분의 심경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외로웠겠는가. 물론 이제 다시 그때의 그 상황에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나의 선택은 분명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형님의 고민과 불안만은 나눠지려고 힘껏 노력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되돌아보면 황장엽형님에게는, 76세에 노동당중앙위원회 사상 및 외교 담당비서라는 현직을 버리고 대한민국에 정치망명한 것 자체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김일성족속 반대투쟁이었고 사상전향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김정일을 증오하고 반대한 것만으로도 형님은 북한 최고위층에서 망명한 노정객으로서의 소명을 다 하셨다. 그 외에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런 명백한 이치를 형님이 정치망명할 당시의 나이 대에 들어서서야 일게 되었으니······.

 

2014년 9월 대한민국 정부 관계기관으로부터 명예회복을 통지받던 날 새벽에 나는 꿈속에서 황장엽형님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분명 "너는 그 급한 성격이 문제야. 성질을 죽여야 병도 나을 수 있어······" 하는 형님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창문을 열고 밝아오는 창천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힘껏 소리쳤다.

 

   "형님, 진심으로 미안하고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대한민국에 온 이래 처음으로 황장엽형님의 빈자리를 무겁게 느끼며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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