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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40주년 기념 여행

버팀목2 2023. 12. 9. 12:18

결혼 40주년 기념 여행 구례 화엄사

 

김봉은

 

 

   운정(雲頂)은 아침공양을 마치자 바랑을 챙겼다. 바랑을 챙긴다고 해 보았자 누더기승복 한 벌과 밥그릇 · 국그릇으로 쓰는 바리때 두 개, 금강산 박달나무를 손수 깎아 30년 가까이 사용해 오고 있는 숟가락과 젓

가락, 광목수건 한 개가 전부였다. 또 다른 소유물이 있다면 입고 있는 승복과 나무단주(短珠) · 고무신이었다. 길을 나서 걷기에 지치면 버려진 막대기로 지팡이를 삼았고, 어느 절에든 머물게 되면 그 막대기는 땔감으로 보태었기에 지팡이는 일정한 소유물이 아니었다.

   각황전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는 운정의 가슴에는 공허한 바람이 맴을 돌고 있었다. 삭발한 지 40여 년, 어느 길을 돌고 돌아 여기에 와 있으며, 깨닫고 이루었음이 그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의 허망한 그림자를 보아야 하는 고뇌스런 신음이었다. 각황전 앞에서 그 회한이 더 깊어짐은 무슨 연유인가. 각황전을 이루어낸 그 어느 이름 모를 목수의 금강석같이 견고한 신심과 원력 앞에 삭발승의 부끄러움이 새롭게 도지는 탓일 것이었다.  열아홉 나이에 불사에 참여한 그 목수가 각황전을 다 짓고 났을 때는 일흔아홉이 되어 있었다 한다. 실로 60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고, 그는 그동안 각황전 언저리를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다. 완공과 함께 머리에 동여맨 수건을 푼 그는 각황전 돌계단을 걸어 내려와 뒷개울로 사라졌다. 그는 한나절이 넘도록 몸을 씻었다. 그리고 그날 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자 어둠에 묻혀 있던 경내가 갑자기 휘황한 빛으로 밝아졌다. 놀란 대중들이 밖으로 나와 보니 한 마리의 백학이 현란한 빛을 뿜으며 각황전 위를 너훌너훌 날고 있었다. 그 백학은 각황전 위를 세 번 돌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목수를 어찌 기술자라고만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각황전이 어찌 솜씨로만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솜씨 뛰어난 기술자였을 뿐이라면 그 목수가 어찌 60년의 세월을 견디고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인가. 매시(每時)가 차가운 인내로 채워졌음이고, 하루하루가 뜨거운 신심으로 타올라 마침내 시공계(時空界)를 초월하는 경지에 들어 60년 세월이 하루같이 된 것이

아닐 것인가. 인간의 시간으로 그 긴 60년을 하루로 초월한, 청정한 영혼이 빚어낸 솜씨는 또 어떠했으랴. 이미 범상을 벗어난 그 솜씨로 빚어낸 것이기에 각황전은 저리도 빼어나고 신비로운 불전이 된 것인가. 일찍이 선암사로부터 발길을 시작해 지리산을 돌아 경상도로 건너가 태백산맥의 긴긴 줄기를 거슬러 오르며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대소 사찰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들렀고, 다시 그 길을 되짚어 내려오면서 살펴보았지만 각황전만  한 불전을 찾지 못했음이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음은 백학으로 환생한 그 목수의 넋이 깨우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이 독특한 문 창살 하나, 기와지붕, 그 목수의 넋은 각황전 부분 부분에서 역력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일찍이 깨달음을 이룩하신 세존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녹슬지도 썩지도 않을 순금의 말씀을 남기시었고, 신심 뜨거운 목수는 세월을 따라 변하는 인간의 간사한 눈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도록 빼어난 모습의 불전을 남겼는데 삭발하여 4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어느 번뇌의 샛길만 방황하다가 이제 또 그 허허로운 발길을 어디로 돌리려 하고 있음인가. 운정은 점점 세차게 일어나는 부끄러움의 물결에 떼밀리듯 각황전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중략~

 

▣ 조정래의 태백산맥 - 2 -

새가 창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중에서-

 

   한 달포 전에 집사람이 넌지시 오는  2.20일이 결혼 40주년인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여태껏 달리 여행을 가 본 일도 없었고 어디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사람은 나와 결혼 후 여고시절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의 딸과 친구였는데 어쩌다 어울려 놀다 보면 집주인 친구 엄마가 소현이는 가정 형편상 대학을 못 가는 학생이니 앞으로 어울리지 말고 너는 장래를 위해서 대학 가는 친구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말을 엿들은 후 가슴 알이로 살아왔다고 내게 말해었다. 그래서 한풀이로 양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로 입학하여 졸업 후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다가 최근 통영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시행하는 아이 돌봄 지원사업인 유아돌보미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을 출근을 한다. 그리고 나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대부분 수사분야에서 근무하였고 퇴직 전 10여 년을 관내에서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휴일과 상관없이 1시간 이내에 현장에 임장 해야 하는 초급 경찰 수사간부로 공직 생활을 하였기에 부부간에 여행을 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이 살아왔었다.  

 

   그런 연유로 퇴직 후 가족여행으로 4박 5일간 괌 여행을 다녀오긴 했지만 이번 결혼 기념 여행은 부부간에 첫 여행으로 휴일인 19일에 떠나기로 했다. 물론 가는 곳은 나에게 일임했다. 아침 일찍 나는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 집사람은 오전 내내 장가도 안 가고 따로 혼자 광도면 죽림에서 살고 있는 아들 동완이가 빨랫감을 갖다 놓았기에 세탁기를 돌리고 일주일 동안 밀린  집안 정리를 하느라 낮 12시가 되어서야 출발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떠나기 전 여행지를 인터넷으로 여러 곳을 검색해 보았지만 딱 마음에 와닿는 곳은 떠 오르지 않았다. 여행이나, 음식이나 자주 하는 사람이 잘 즐긴다는 말이 실감 났다. 돌아올 시간까지 염두에 두면 당일치기로는 멀리 가지도 못할 것 같아 통영 미륵산 용화사 주지 스님을 역임했던 묘유스님과의 딱 한 번의 인연을 떠 올리며 묘유스님이 주지스님으로 계셨던 남해 보리암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두 번이나 읽으며 인상 깊었던 각황전이 있는 구례 화엄사 둘 중에 선택하라고 했다. 물론 내가 이 두 곳의 여행지를 선택한 이유는 집사람은 모른다.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은 집사람이 먼저 도보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인지를 물었다. 남해 보리암은 산꼭대기에 있지만 셔틀버스로 올라가고 화엄사는 평지에 있기 때문에 두 곳 모두 접근이 용이하다고 말했더니 셔틀버스 말에 보리암은 언젠가 한번 가 본 것 같다고 화엄사로 가자고 한다.

 

   1시간 30분이 걸려서 화엄사 입구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온다. 진행방향 반대편에 있는 '송이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유턴해서 송이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으로는 늦은 시간이지만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제법 이 지역에서는 유명세를 타는 식당 같았다. 메뉴판에 돌솥밥 정식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집사람과 같이 나온 여행길이니 그래도 제법 모양새 나는 밥은 먹어야 되지 않겠나 싶다. 1인분에 19,000원짜리 돌솥밭 정식을 주문했다.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그 식당에서 파는 '고택 찹쌀생주' 한 병도 구매해서 가방 속에 넣었다. 입은 술을 달라고 야단법석인데 운전대를 계속 잡아야 하니 감성을 이성이 눌러 이겼다. 집사람은 반찬 가짓수가 많은 것을 억수로 선호한다. 그래서 한 번씩 새터 시락국집에 갈 때면 반찬 가짓수가 제일 많은 '훈이시락국집'을 손가락으로 꼽는데 거기는 토, 일요일은 객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이 와서 줄을 서기 때문에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집사람이 선호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기에 한 번은 비위를 맞췄다는 자부심이 꿈틀거렸다. 이어서 지리산대화엄사 일주문을 지나니 문화재 관람 입장료를 징수하는 곳을 카드로 결제하고 통과했다. 떠나기 전 인터넷에서 화엄사를 검색했더니 입장료가 성인 3,500원이라고 돼 있었는데 가스비 등 모든 물가가 인상되었다고 난리 더니 화엄사 문화재구역입장료도 500원이 인상되어 4,000원을 징수하고 있었다. 평일이다 보니 화엄사 경내로 승용차로 입장이 가능했다. 경내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절간의 중심건물 대웅전을 마주 보고 들어섰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 불상으로 모신 절의 중심 법당이지만 화엄사 대웅전 법당에는 목불인 삼신불이 모셔져 있었다.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년(1636)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황전(覺皇殿)을 마주 했다. 각황전(국보 제67호)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계파 대사가 중건한 증층의 대불전이다. 원래 이 터는 장육전(丈六殿)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 타 없어졌다. 장육전 중창 불사는 영조의 모친 숙빈최 씨도 동참하여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하였고, 연잉군(영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1703년에는 삼존불, 사보살상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대법회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 하자 조정에서는 각황전이라고 사액하였다. 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하였다. 화엄사 각황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하고 있다. 각황전의 각황은 부처님이 깨달은 왕(성인 중의 성인)이라는 뜻과 숙종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 출처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안내문에서.

 

  입소문으로 유명한 각황전 앞 홍매화 나무를 감상했다, 붉은 꽃망울이 이제 막 몽실몽실 맺기 시작했는데 올해 화엄사 홍매화는 3월 20일경 만개할 것이라고 한다.

 

  이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계파 선사께서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홍매화를 심었다고 한다. 일명 장육매(丈六梅)이라고 하며, 또는 각황매(覺皇梅), 각황전 삼존불(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다보불)을 표기하여 삼불목(三佛木)이라 불린다고 한다. 홍매화의 붉은 꽃빛은 시주할 돈이 없어 애태우며 간절한 헌신 공양한 노파의 마음이런가, 환생한 공주의 마음이런가, 언제나 위태로운 왕자를 보며 애태운 숙빈최 씨의 마음이런가. 홍매화는 그들의 피 끓고 애타는 마음의 빛깔처럼 붉고 또 붉었다. 홍매불자는 향긋한 향기를 불보살님 전에 올리고 아름다운 자태를 참배객에게 보여주어 환호심을 불러일으키니 고색창연한 가람 화엄연화장법계와 화엄동천에 홍매화 향이 가득하네.   

▣ 출처 :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화 안내문에서

 

   대웅전 지붕 사이로 올려다본 노고단에는 아직도 지난겨울 내린 눈으로 덮여 있었다. 공양간 옆 도랑 건너 저 언덕배기 길은 10여 년 전 내가 2박 3일간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를 하러 올라가던 길이다. 지금 와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화엄사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동 화개장터에 들러 화송고 버섯을 2통을 샀고, 죽림 이마트에서 한우 부챗살 포장육을 사서 집으로 가져왔다. 결혼 40주년 짧은 여행을 마치고 귀가한 저녁시간에는 화개장터에서 사 온 버섯과 이마트에서 산 부챗살을 굽어 구례 송이식당에서 사 온 찹쌀 누룩으로 빚은 '고택 찹쌀생주'로 남은 생 사는 날까지 실컷 행복을 즐기자며 집사람과 축배를 들었다. 이제껏 서로의 직장생활 때문에 어긋나서 즐기지 못한 인생을 앞으로 아낌없이 남은 정열을 불태우며 살아가자고 의기투합한 마무리였다. 

 

 

 

결혼 40주년을 구례 화엄사에서

 

                                                                                                              김봉은

 

 

한 달포 전에 집사람이 넌지시 220일이 결혼 40주년인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며 제안을 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여태껏 달리 여행을 가 본 일도 없었고 어디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사람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여고 시절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의 딸과 친구였는데, 친구 엄마가 소현이는 가정 형편상 대학을 못가니 앞으로 어울려 놀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한다. 그 후 가슴앓이로 살아왔다고 내게 말했었다.

결혼 후 그녀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양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로 입학하여 졸업 후 사회복지사로 활동해왔다. 최근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시행하는 아이 돌봄 지원사업인 유아 돌보미로 주 6일을 근무한다.

나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대부분 수사 분야에서 근무하였고 퇴직 전 10여 년을 관내에서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휴일과 상관없이 1시간 이내에 현장에 임장해야 하는 초급 경찰 수사간부로 공직 생활을 하였기에 부부가 여행할 경제적이고, 시간적 여유 없이 살아왔다.  

퇴직 후 처음으로 가족여행으로 45일간 괌 여행을 한번 다녀오긴 했다. 이번 결혼 기념 여행은 부부의 첫 여행으로 휴일인 19일에 떠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나는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 아내는 오전 내내 바빴다.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36살 노총각인 아들은 독립해 살고 있는데 빨랫감을 잔뜩 갖고 왔다. 아내는 세탁기를 돌리고 일주일 동안 밀린 집안 정리를 하느라 정오가 되어서야 출발을 했다.

떠나기 전 인터넷으로 여러 곳을 검색해 보았다. 돌아올 시간까지 염두에 두면 멀리 가지 못할 것 같아 남해 보리암과 각황전이 있는 구례 화엄사를 생각했다. 둘 중에 선택하라고 했더니 화엄사로 가자고 한다. 내가 이 두 곳을 선택한 이유를 집사람은 잘 모르리라. 남해 보리암은 산꼭대기에 있지만 셔틀버스로 올라가고, 화엄사는 평지에 있기 때문이다.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1시간 30분을 달려서 화엄사 입구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들었다. '송이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으로는 늦은 시간이지만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이 지역에서 명성이 있는 식당 같았다. 메뉴판에 돌솥 밥 정식이 눈에 들어왔다. 집사람과 같이 나온 여행길이니 그래도 제법 모양새 나는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나싶어 1인분에 19,000원짜리 돌솥 밭 정식을 주문했다.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그 식당에서 파는 '고택 찹쌀생주' 한 병 사서 가방에 넣었다. 입은 술을 달라고 야단법석인데 운전대를 계속 잡아야 하니 감성을 이성이 눌러 이겼다. 집사람은 반찬 가짓수가 많은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한 번씩 새터 시락국 식당에 갈 때면 반찬 가짓수가 제일 많은 '훈이 시락국집으로 간다. 주말에는 객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줄을 서기 때문에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아내의 비위를 맞췄다는 자부심이 꿈틀거린다. 그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오늘도 점수를 땄으리라.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 문화재 관람 입장료를 내고 통과했다. 휴일임에도 화엄사 경내로 승용차 입장이 가능했다. 경내 주차장에 주차하고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 불상으로 모신 절의 중심 법당이지만 화엄사 대웅전 법당에는 목불인 삼신불이 모셔져 있었다.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1636)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황전(覺皇殿)을 마주했다. 각황전 건물 신화를 유심히 읽은 터라 감회가 새로웠다.

각황전을 건축한 목수는 열아홉 나이에 불사에 참여했는데 각황전을 다 짓고 났을 때는 일흔아홉이 되어 있었다 한다. 실로 60년 만의 완공이다. 그는 완공이 되자 머리에 동여맨 수건을 풀고 개울로 가서 한나절이 넘도록 몸을 씻었고, 그날 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자 어둠에 묻혀 있던 경내가 갑자기 휘황한 빛으로 밝아졌다. 밖으로 나와 보니 한 마리의 백학이 현란한 빛을 뿜으며 각황전 위를 너울너울 세 번 돌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각황전이 어찌 인간의 솜씨로만 건축되었다고 할 수 있을 까. 인간이라면 어찌 60년의 세월을 견디고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인가. 뜨거운 불심으로 마침내 시공계(時空界)를 초월하는 경지에 든 그는 부처님의 가호 없이는 해내지 못했으리라”. 깊은 사연을 아내에게 들려주니 역시 감탄했다.

각황전(국보 제67)은 조선 숙종 28(1702)에 계파 대사가 중건한 증층의 대불전이다.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25(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1702)에 완공하였다. 1703년에는 삼존불, 사보살상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대법회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 하자 조정에서는 각황전이라고 사액하였다. 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하였다.

화엄사 각황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하고 있다. 각황전의 각황은 부처님이 깨달은 왕(성인 중의 성인)이라는 뜻과 숙종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각황전 앞 홍매화 나무를 감상했다, 붉은 꽃망울이 이제 막 몽실몽실 맺기 시작했는데 올해 홍매화는 320일경 만개할 것이라고 한다,

이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계파 선사께서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홍매화를 심었다고 한다. 일명 장육매(丈六梅)이라고 하며, 또는 각황매(覺皇梅), 각황전 삼존불(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다보불)을 표기하여 삼불목(三佛木)이라 불린다. 홍매화의 붉은 꽃 빛은 시주할 돈이 없어 애태우며 간절한 헌신 공양한 노파의 마음이며, 환생한 공주의 마음인가. 언제나 위태로운 왕자를 보며 애태운 숙빈최씨의 마음이런가. 홍매화는 그들의 애끓고 마음의 빛깔처럼 붉고 또 붉었다. 홍매 불자는 향긋한 향기를 불보살님 전에 올리고 아름다운 자태를 참배객에게 보여주어 환호심을 불러일으킨다고 각황전 앞 홍매화 안내문에 적혀있었다.

 대웅전 지붕 사이로 올려다본 노고단에는 아직도 지난겨울 내린 눈이 덮여 있었다. 공양간 옆 도랑 건너 저 언덕배기 길은 10여 년 전 내가 23일간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를 하러 올라갔던 길이다. 젊은이 하나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나였다.

돌아오는 길에 화개장터에 들렀다. 결혼 40주년 짧은 여행을 마치고 귀가한 저녁은 화개장터에서 사 온 버섯과 이마트에서 산 부챗살을 굽고 구례 송이식당에서 사 온 '고택 찹쌀생주'로 축배를 들었다. 서로의 직장생활 때문에 어긋나서 즐기지 못한 인생을 앞으로는 아낌없이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약속하는 의미였다.

 

▣ 최종본

 

 

 

 

 

 

 

결혼 40주년을 구례 화엄사에서 

 

                          김봉은

 

한 달포 전에 집사람이 넌지시 2 20일이 결혼 40주년인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며 제안을 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여태껏 여행을 가 본 일도 없었고 어디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집사람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여고 시절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의 딸과 친구였는데친구 엄마가 소현이는 가정 형편상 대학을 못 가니 어울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한다그 후 가슴앓이로 살아왔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녀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양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로 입학하여 졸업 후 사회복지사로 활동해왔다최근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시행하는 아이 돌봄 지원사업인 유아 돌보미로 주 6일을 근무한다.

나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대부분 수사 분야에서 근무했다. 퇴직 전 10여 년을 관내에서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휴일과 상관없이 1시간 이내에 현장에 임장해야 하는 초급 경찰 수사간부로 생활하였기에 부부가 여행할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퇴직 후 처음으로 가족여행으로 4 5일간 괌 여행을 한번 다녀오긴 했다이번 결혼 기념 여행은 부부의 첫 여행으로 휴일인 19일에 떠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나는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 아내는 오전 내내 바빴다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36살 노총각인 아들은 독립해 살고 있는데 빨랫감을 잔뜩 갖고 왔다아내는 세탁기를 돌리고 일주일 동안 밀린 집안 정리를 하느라 정오가 되어서야 출발을 했다.

떠나기 전 인터넷으로 여러 곳을 검색해 보았다돌아올 시간까지 염두에 두면 멀리 가지 못할 것 같아 남해 보리암과 각황전이 있는 구례 화엄사를 생각했다둘 중에 선택하라고 했더니 화엄사로 가자고 한다내가 이 두 곳을 선택한 이유를 집사람은 잘 모르리라남해 보리암은 산꼭대기에 있지만, 셔틀버스로 올라가고, 화엄사는 평지에 있기 때문이다무릎 상태가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1시간 30분을 달려서 화엄사 입구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들었다. '송이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점심시간으로는 늦은 시간이지만 손님이 꽉 차 있었다이 지역에서 명성을 얻는 식당 같았다메뉴판에 돌솥 밥 정식이 눈에 들어왔다집사람과 같이 나온 여행길이니 그래도 제법 모양새 나는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나. 1인분에 19,000원짜리 돌솥 정식을 주문했다그런대로 먹을만했다. 식당에서 파는 '고택 찹쌀생주를 한 병 사서 가방에 넣었다입은 술을 달라고 야단법석인데 운전대를 계속 잡아야 하니 감성을 이성이 눌린 것이다집사람은 반찬 가짓수가 많은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한 번씩 새터 시락국 집에 갈 때면 반찬 가짓수가 제일 많은 '훈이 시락국‘ 집으로 간다주말에는 객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줄을 서기 때문에 나는 별 좋아하지 않지만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아내의 비위를 맞췄다는 자부심이 꿈틀거린다그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오늘도 점수를 땄으리라.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 문화재 관람 입장료를 내고 통과했다평일이다 보니 화엄사 경내로 승용차 입장이 가능했다경내 주차장에 주차하고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 불상으로 모신 절의 중심 법당이지만 화엄사 대웅전 법당에는 나무부처인 삼신불이 모셔져 있다대웅전 편액은 인조 14(1636)에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황전(覺皇殿)을 마주했다각황전 건축이야기를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유심히 읽은 터라 감회가 새로웠다.

각황전을 건축한 목수는 열아홉 나이에 불사에 참여했는데 다 짓고 났을 때는 일흔아홉이 되어 있었다 한다실로 60년 만의 완공이다그는 완공이 되자 머리에 동여맨 수건을 풀고 개울로 가서 한나절이 넘도록 몸을 씻었고그날 밤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가 세상을 떠 자 어둠에 묻혀 있던 경내가 갑자기 휘황한 빛으로 밝아졌다밖으로 나와 보니 한 마리의 백학이 현란한 빛을 뿜으며 각황전 위를 너울너울 세 번 돌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각황전이 어찌 인간의 솜씨로만 건축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인간이라면 어찌 60년의 세월을 견디고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인가뜨거운 불심으로 마침내 시공계(時空界)를 초월하는 경지에 든 그는 부처님의 가호 없이는 해내지 못했으리라깊은 사연을 아내에게 들려주니 역시 감탄했다.

각황전(국보 제67)은 조선 숙종 28(1702)에 계파 대사가 중건한 증층의 대불전이다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25(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1702)에 완공하였다. 1703년에는 삼존불사보살상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대법회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 하자 조정에서는 각황전이라고 사액하였다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하였다.

화엄사 각황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각황전의 각황은 부처님이 깨달은 왕(성인 중의 성인)이라는 뜻과 숙종 임금에게 불교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각황전 앞 홍매화 나무를 감상했다붉은 꽃망울이 이제 막 몽실몽실 맺기 시작했는데 올해 홍매화는 3 20일경 만개할 것이라고 한다,

이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계파 선사께서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홍매화를 심었다고 한다일명 장육매(丈六梅)라고 하며또는 각황매(覺皇梅), 각황전 삼존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다보불)을 표기하여 삼불목(三佛木)이라 불린다홍매화의 붉은 꽃 빛은 시주할 돈이 없어 애태우며 간절한 헌신 공양한 노파의 마음이며환생한 공주의 마음인가언제나 위태로운 왕자를 보며 애태운 숙빈최씨의 마음이런가홍매화는 그들의 애끓고 마음의 빛깔처럼 붉고 또 붉었다홍매 불자는 향긋한 향기를 불보살님 전에 올리고 아름다운 자태를 참배객에게 보여주어 환호심을 불러일으킨다고 ‘각황전 앞 홍매화 안내문에 적혀있었다.

대웅전 지붕 사이로 올려다본 노고단에는 아직도 지난겨울 내린 눈이 덮여 있었다공양간 옆 도랑 건너 저 언덕배기 길은 10여 년 전 내가 2 3일간 화대 종주(화엄사~대원사)를 하러 올라갔던 길이다젊은이 하나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자세히 보니 나였다.

돌아오는 길에 화개장터에 들렀다결혼 40주년 짧은 여행을 마치고 저녁 식사는 화개장터에서 사온  버섯과  부챗살을 굽고 고택 찹쌀생주로 축배를 들었다서로의 직장생활 때문에 어긋나서 즐기지 못한 인생을 앞으로는 아낌없이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약속하는 의미였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내년부터는 아내가 말하기 전 꼭 결혼기념일을 챙겨서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떠나리라 다짐해 본다.

 

▣ 수필가 양미경 선생님의 첨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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