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4.04.05(금) 식목일,한식. 밤하늘 별 두 개를 보다

버팀목2 2024. 4. 5. 08:50

2024.04.05(금) 흐림

 

 

한식날 초저녁 밤하늘에 별 두 개를 보았다.

 

 

☆     노  을  에   기  대  어

오늘도 노을이 집니다
해 지는 저녁 옥탑에 올라 노을에 기대어 봅니다
하루가 또 저물어 갑니다
해 질 녘 고개 숙인 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저마다 땀 흘린 얼굴을 석양에 묻고
붉게 물든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 버스를 기다립니다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드나 봅니다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자라는 선인장처럼
하루하루를 모질게 살아가야 되나 봅니다

우리네 인생이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짐승이라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함 보다는 어렵고 고되고
힘든 일이 더 많은 세상을 묵묵히 살아가야 함을 모르지 않지만

오늘 같이 그리움 가득 머금은 노을이 가슴을 태워
아프고 서글퍼지는 날이면
사랑하는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없이 울고 싶습니다

이런 게 삶이지만
이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된 게 인생이지만
외롭고 그리운 마음은 숨길 수가 없어서
세상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로 마음이 상할 때마다
당신을 떠올리곤 합니다

외진 바닷가 몽돌 밭의 조약돌처럼
거센 파도가 밀려와 부딪칠 때마다
사그락사그락 모나고 거친 몸을 둥글리고 둥글려서
이쁘고 반들반들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당신을 그리워하곤 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상처 입은 마음도 아물곤 합니다


☆* 시ㆍ원 *   중에서  /    김    용    식            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흐르게 했던 왕은 태종(太宗 1367~1422) 이방원이었다. 방번, 방석 어린 형제는 물론 개국공신 정도전부터 처가 민 씨 집안까지 완전히 도륙을 냈던 이방원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이어 그 자식 이방원에게도 태(太) 자가 붙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식이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오른 이유는? 

 시호는 왕의 붕어(崩御) 이후, 후인(後人)들이 붙인다.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 즉 세종과 그 신하들은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와 같은 동급의 왕이었다는 평가를 한 것이 분명하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사림세력들이 추구했던 신권정치(臣權政治)에 맞서 왕권정치(王權政治)를 정립하고 수호했던 인물이다. 이에 반대하거나 왕의 권위에 위협이 될 기미가 보이는 자들은 모두 주살(誅殺)하였다. 신하는 물론 친가와 외가, 처가의 처남까지 예외가 없었다. 태종은 왕권이 확고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른다. 왕권에 맞서거나, 장애가 될 모든 인물을 제거한 이방원. 그리하여 아들 세종은 부친이 닦아놓은 탄탄대로의 길에서 5,000년 민족역사에 남는 최고의 치적을 이룬다.

 훈민정음 창제부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장영실의 과학까지 참으로 눈부신 날을 이룬다. 태종이라 붙인 이유에 함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태종의 말 때문이라고 한다.

 "10명의 신하가 있다고 치자. 그중의 한 명은 틀림없는 충신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한 명은 반역을 꿈꾸는 역적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8명은 누구일까."

 "나머지 8명은, 내가 강하면 충신(忠臣)이 되고, 내가 약해지면 역적(逆賊)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고뇌와 처갓집까지 멸문을 시킨 그 번뇌(煩惱)를 이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맞이해야 할 슬픔이요, 고독이 아니겠는가.

 

 박근혜의 몰락 속에서 발견한 것은 돌아선 8명이었다. 김무성이 그랬고 이정현이 그랬고 유승민, 이준석이 그랬다. 평소에 입이 닳도록 충성을 약속하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돌아섰다. 그들은 비박과 친박이란 이름으로 당쟁싸움에 골몰했을 뿐, 주군의 위기엔 무기력한 존재였고, 배신자들이었다.

  ~중략~    

 소훼란파(巢毁卵破). 둥지가 무너지면, 그 안의 알들도 무사하지 못한다.

 ~생략~

 

 시인 정재학 쓴 글. 필사  

 

 

 

 

 그동안 신경치료를 하여 사용해 왔던 우측 하악 어금니가 작년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번 진통이 오기 시작하면 그쪽으로는 음식물을 씹지 못한다. 약 일주일 동안 고통 속에 지낸다. 치과를 방문해서 조치를 받아 오긴 하지만 그동안 서너 번 말썽을 부려 오기를 반복했다. 담당 의사가 진통이 멈추면 그때 발치하라고 권장했지만 인간 속성이 통증이 오고 고통스러울 때는 의사 말을 듣고 뽑을 걸 그때 후회하지만 사실상 상태가 호전되면 까맣게 잊고는 뽑기가 아깝다. 지난번 제주 올레길에 나섰다가 치통으로 고생하면서 진통제를 구매해서 복용하면서 이번에 치통이 진정되면 반드시 발치할 거라고 명세했었다. 그런데 이전에도 그랬듯이 또 잊고 지냈는데 어제 한아름 클라이밍센터 개소식에 갔다가 음식물 취식에 어려움을 겪었다. 내일 반드시 치과를 갈 거라고 생각했다. 오전에 치과를 방문하기 전 양치질을 신경 써서 두 번씩이나 하고는 죽림 연세미소치과를 방문했다. 의사가 심적으로 발치를 결정했냐고 재차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취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처방전을 들고 3층에서 1층으로 이동하여 약국에서 처방전으로 약을 3일 치 구매해서 올라와서 한 봉지를 먼저 먹었다. 이어서 발치를 하고는 가아제를 물려주면서 2시간 후에 뱉으라고 했는데 그 2시간이 얼마나 긴지 몰랐다. 오후 2시경 압박용 가아제를 뱉었으나 지혈이 되질 않았다. 간호사가 예비로 준 가아제 3 봉지 중에 1개를 꺼내서 다시 물기를 1시간 후에 반복하기를 2회를 더 하고 나니 오후 5시쯤에  출혈이 멈춘 것 같았다. 배고픔에 냉장고 안에 있는 빵을 꺼내서 당케어 음료와 조심조심 씹어서 삼겼다. 지난번에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식사를 하다가 입안 볼태기를 씹어서 출혈이 심해서 병원으로 다시 간 적도 있기에 정말 조심스레 씹었다.

 저녁 8시쯤에 지인이 '죽 만드는 림' 식당에서 가져온 전복죽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약을 먹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식사를 했다. 마취가 이제 풀린 것 같았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고 있는데 김 x찬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제저녁 부린 주사(酒使)를 지인을 통해 들었다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이 식목일인데 식목일은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 인근 야산에 나무를 심는 행사가 있곤 했었다. 그런데 우리는 식목일 즈음이 나무 심기가 적절한 시기인 줄 알았는데 오늘 뉴스에서 얼핏 보았는데 나무 심기 적기는 나무가 잎을 띄우기 전 그러니까 겨울이 끝날 즈음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지금 나무가 움을 띄워 새순이 돋고 있는 시기인데 이 시기에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옛 고교시절 임업 담당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하신 강의 내용이 새삼 떠올랐다. 유실수 묘목은 가을철 잎이 떨어지고 난 뒤에 심어야 수확을 1년 앞당길 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무를 심을 구덩이를 되도록이면 귀찮아도 나무 뿌리 둘레보다 더 크게 파서 심어야 착근이 용이하고 나무가 빨리 자란다는 말씀도 생각났다. 식목일날의 단상(斷想)이다.

 

※단상(斷想) : 때에 따라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 또는 그것을 적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