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19.01.04(금)

버팀목2 2019. 1. 11. 09:48

2019.01.04(금) 맑음






"나의 성장기와

내 인생을 반추(反芻)해 볼 시점에 섰다"


일단 이렇게 제목이 떠올라 가설정 해 두고

이제부터 내 살아 온 과거를 그려 볼 요량입니다   



내가 자라 오면서 성장기에 있었던

돌아보면 정말 부끄러운 내가 자초한 일상들이 있었는데

한번씩 그들이 내 숨기고 싶었던 과거를 되씹곤 할때마다 땅속으로라도 숨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내가 태어나게 해준 내 아버님의 초상때 일입니다


저는 내 아버지 쉰다섯!

내 어머니 마흔넷에 12번째로 태어난 막내 사내였습니다

울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널 하시던 말씀이 자식농사를 반타작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인즉

열두면을 낳았으나 성인이 된 자식은 여섯이고 

나머지 여섯은 어릴적 성장과정에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보낸 

어머님의 가슴에 묻은 자식들입니다


내 나이 열한살에 봄비가 뿌리던 날 이월 열 닷세 새벽에

작은 방에서 자고 있는데 잠결에 큰방에서 나는 통곡소리에 잠을 깼는데

어렴풋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겁이 덜컹나서 큰방으로 달려 가지 못하고

이불속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슬픔보다는 통곡소리에 뇌동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어머니가 저를 불렀습니다


하천 건너 살고 계시는 삼촌(작은 아버지)댁에 가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하고

이후 조치사항을 물어서 알아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삼촌은 장남인 아버지보다 무려 스무한살이나 작은 이남사녀의 막내였는데

당시 딸만 둘이고 아들이 없어 숙모가 인근 사계사 절에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으로 백일기도 중이라 

삼촌은 자기 형님 초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내 부끄러운 과거는 그때의 일입니다

마을 앞산 뻔득에서 노제를 지내는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백설기 떡을 잘라 노제를 구경온 애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는데

내가 그 떡을 받아 먹겠다고 동네 아이들 틈에 끼어 줄을 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자라오면서 수도 없이 둘째 형님은 나를 면박 주듯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가족 친지들과 아버지 초상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단골 매뉴로 꺼집어 내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사실이 자라오는 과정에 첫번째 수치스럽게 여겨온 내 과오였습니다


그래서 내 둘째 형님과는 내 마음속에 척을 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척을 지게 되는 원인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아버지 돌아 가신 후에

지금 팔순 중반에 접어 든 큰 누님이

어떤 연유로 처가 동네인 우리 마을로 집을 지어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생질들이 사내만 넷인데 내 위로 하나가 있고 아래로 셋이 있었는데

유독 그들을 좋아 하면서 내가 하는 일은 사사건건 못마땅해 하면서 눈치를 주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여수에서 무역선을 타고 있던 큰형님댁에 방학중에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를 방치하다시피 하면서 버스를 탈때나 여객선을 타고 가면서 옆에 앉히지 않고

저멀리 떨어져 다녀 왔습니다

나는 혹여 복잡한 객선머리에서 형을 잃을까봐 부지런히 쫓아 다녔지만

금새 멀어지곤 하는 풍경이 지금도 떠 오릅니다


그런일이 내 어린가슴에 둘째 형님을 원망하는 씨앗을 심는 줄 그는 몰랐을 것입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때 입니다


읍네에서 방위병으로 중대본부에 근무하는 중학교 동창생이 집으로 찿아 왔습니다


대뜸 이야기가 셋째 형님 이름을 들먹이며 너희 형님 맞는냐고 하면서 학력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응겹결에 중학교 졸업하고 양복점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나중에 집안에 풍파를 몰고 왔습니다


국졸은 방위병이고

중졸은 현역 입영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입영통지서가 날아 오고 난 뒤 사단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셋째 형님은 말더듬이 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말더듬이는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한 관계로 군인이 될 수 없는 자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부산 국군통합병원까지 가서 실사를 받는 과정을 거쳐 군 면제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이 복잡하고 과다한 자금이 소모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실대로 국졸이라고 말했더라면 아무일 없었을텐데 

중학교 동창생에게 내 형님이 국졸인 것이 쪽팔려서 중졸이라고 말한 내 실수로 인해서 

남자 형제간 들에게서 생전내내 미움을 받게되는 단초를 제공한 내 두번째 과오였습니다 


2016년 추석을 앞두고 고향마을 앞에 있는 아버님 산소에 벌초까지 동행하였고

추석때 소주잔도 부딪힌 둘째 형님이 갑자기 건강 악화로 그해 초겨울 돌아 가셨고

당시 요양원에 계시던 칠십아홉의 큰형님에게는 둘째가 죽었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는데

지난해 큰형님 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두분의 초상을 진두지휘하며 마무리를 했습니다

둘째 형님은 49제를 사천에 있는 백룡사에서 거행을 하고는 보내 드렸고


큰형님은 살아 생전에 자기는 유해를 소산하고

형수님은 묘지에 모시라는 그 속뜻을 받들어 고성 상리 이화공원 합봉묘에 모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저승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내 잘못을 사과하지 못했습니다

사과보다는 원망의 씨앗을 키워 왔었습니다

이제라도 내 소시쩍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요

진정 사과 드립니다

나는 내 형제중에 유일하게 중학교를 진학하였습니다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 하는데


고교를 객지로 가겠다는 나를

부모님이 재산이 없어 남의집 종살이 하며 살았다는 한풀이로

당시 무역선에 종사하면서 번 돈으로 고향마을 논과 밭을 사 모으는데 전력투구하여

고향집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위한 답시고

어릴땐 마지막 남은 동생 너가 공부를 잘하니까 우리 형제들 공부 못한 것 너라도 하라며

미국 유학까지 보내 준다고 했다가 자기 자식들 머리 커지니까 딴 생각 품었다고

큰형님을 원망하고 살았습니다


집안에 공직에 나아 간 사람이 없다 보니

순경 계급위에 경장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후 나는 경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살았습니다

내 나름 고충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 시각에서 바라보면 요직에서만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퇴직후  내가 선 자리를 살펴 보니

주위를 관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저승에서 편하게 쉬십시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기해년 정월 초나흘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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