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1.08.30(월)

버팀목2 2021. 8. 30. 08:54

2021.08.30(월) 흐림

 

참다운 그리움

 

무작정 가슴에 담아 놓아

늘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인가

 

하늘 아래 어디에 선들

우러러 눈 질끈 감고 살며시 떠올려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살아 있어 아름다운 까닭 이리라

 

누구나 

기억 한편에 넣어 놓고 허물어 내지 않는

추억 하나 끌어안고 살듯이

되내고 또 되내어도 마음 상하지 않을 

그리움 하나 있으면

참으로 행복한 일이 리라

 

때론, 이유 없는 따스함으로

때론, 까닭 모를 서러움으로

불러 보고 또 떠올려 볼 이름 석자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언젠가

세상이 저만치 멀어져 있어

인생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날

아직 가슴에 꿈틀대는 얼굴 하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정녕 

흔들림 없이 사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아침 이슬 향기  -中- / 이준호

 

이태 지음의 지리산 빨치산 수기 '남부군'을 읽으면서,

조정래 작가의 大河小說 '태백산맥'의 내용과 합치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가령 빨치산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등 인물이 동일 인물로 등장하고 있고,

 

남부군에서 새로운 사실은,

여순 사건을 기자 입장에서 간단하게 사건의 개요를 적시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필사해 보면,

 

   1948년 10월 20일 여수 14연대의 1개 대대가 제주도 토벌작전에 차출되어 여수항을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전날인 119일 오후 8시경 연대 인사계 선임 하사관(상사) 지창수(池昌洙)가 40명의 당 세포원들로 하여금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게 한 다음 비상 나팔을 불어 출동부대인 제1대대를 집합하게 했다. 잠시 후 잔여 2개 대대의 전 병력도 연병장에 ㅈ비합시킨 후 지창수는 제주도 출동 거부, 경찰 타도, 남북통일을 위해 인민군으로 행동할 것 등을 선동하자 대부분의 사병은 환호로써 이에 호응했으며 반대하는 사병 3명은 즉석에서 사살했다.

 

  약 3,000명 정도의 동조자를 얻은 반란 부대는 지창수의 지휘로 여수 시내로 돌입하여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20일 미명(새벽)까지는 여수 시내를 완전 장악했다. 뒤미처 여수 시내에 산재하던 좌익 단체원과 학생 등 600여 명이 반란 부대에 합세하여 시내 중요기관을 모조리 접수했다.

이 무렵부터 반란부대의 총지휘는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인 중위 김지회(金智會)가 맡게 됐는데 20일 오전 9시 30분 약 2개 대대 규모의 반란 부대가 열차 편으로 순천을 향해 북상해 갔고, 순천에 있던 14 연대의 2개 중대가 선임 중대장 홍순석(洪淳錫) 중위 지휘로 반란군에 합류해 버렸다(홍순석은 김지회와 육사 3기 동기생). 

순천을 완전 장악한 반란 부대는 3개 부대로 나눠 학구(鶴口)와 광양 및 벌교의 세 방향으로 분진했으며, 22일 아침까지는 광양, 벌교, 학구, 구례, 곡성, 등을 모조리 점령했다.

 

   국군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10월 21일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인근 7개 대대를 동원, 반란군을 공격하는 동시에 여수 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출동 부대의 일부가 반란군에 합류해버리는 사건도 있었지만 토벌군은 전투사령관 송호성(宋虎聲)의 지휘로 10월 25일까지는 순천과 여수를 탈환하고 소탕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때 반란군 패잔병 약 1,000명이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 화엄사골, 그리고 웅석봉(熊石峯) 등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는데, 같은 해 말경에는 그 수가 350명 정도로 격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49년 4월 9일 지리산 배암사골 반선 부락에서 김지회, 홍순석 등이 사살될 당시에는 다시 2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이 사건에서 반란군 측은 392명이 사살되고 2,298명이 투항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란이 여수, 순천에 걸쳤으므로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부르고 북에서는 '여순병란'이라는 왕조시대 같은 부정적 이미지의 호칭을 쓰고 있다

 

여순사건의 표면상 동기는 제주도로의 파병을 반대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제주도 유격대에 대한 토벌 압력을 다소나마 줄이기 위해 본토 일각에서 말하자면 제2전선을 구축하려는 계확이 진행 중에 있었는데, 돌연한 파병 명령 때문에 봉기를 앞 당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사병 중심으로 진행 중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건 발생의 초기에는 상사인 지창수가 주동이 되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지회는 처음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사병들의 반협박에 의해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로서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사병 중심의 돌발적인 거사였기 때문에 치밀한 작전계획이 결여돼 있었고, 그래서 단 5일 만에 박멸돼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남로당 중앙의 사전 지시나 평양의 지령 같은 것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의 뉴스 보도를 듣고 처음으로 사건이 터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평양방송이 몇 시간 내에 이 사건을 보도했다고 하지만, 평양의 중앙통신은 남한의 통신사들이 전국의 직구들과 교신하는 것을 잡아가지고 지체 없이 평양방송으로 흘리는 일이 자주 있었으므로 그것이 평양 당국이 사건에 샂너 개입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이 사건에 편승해서 최초로 게릴라를 남파 한 것이 한 달이나 지나서였던 것을 보아도 사전 정보는 없었음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이 반란사건은 남로당이나 평양 당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돌발사태였으며, 남로당이 그동안 애써 심어놓은 군부 내의 세포 조직을 깡그리 노출시켜 숙군 작업으로 뿌리를 뽑히고 마는 결정적 손해를 가져왔다. 국군으로서는 내부의 이질분자를 완전 색출 제거하고 커다란 위기에서 군을 재건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만일 이 반란사건이 없었던들 6.25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평양 당국은 처음부터 이 사건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으며, 후일 남로당 숙청 때는 박헌영 등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부 내의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건을 꾸민 것이라고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이때 남로당 간부부장이며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 중 반(反) 김일성 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왔던 이현상(李鉉相)이 자진해서 지리산에 들어갔다. 그가 이 반란군 잔여세력을 기간으로 부근의 야산대와 반란에 동조하다가 도피 중인 민간인을 규합해서 조직한 것이 세칭 '지리산 유격대'이며, 49년 7월부터는 그 공식 명칭이 제2병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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