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방

2021.09.28(화)

버팀목2 2021. 9. 28. 11:59

2021.09.28(화) 흐림, 빨치산의 딸 주요 대목 필사하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1권을 읽고...

 

《빨치산의 딸》은 1947년부터 비합법을 시작한 이른바 '구빨치' 였던 부모님의 삶을 다룬 실록소설이다. 1990년 실천문학사에서 세 권의 장편으로 첫선을 보였으나 출간 직후 공안당국에 의해 이적표현물로 분류돼 판금조치를 당했으며, 책을 출판한 실천문학사의 이석표 대표는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오랜 기간 절판상태로 있다가 이번에(2005년 5월 30일) 두 권으로 새롭게 복간됐다. 

 

작가 정지아는 책 표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한 탁월한 개인보다도 평등한 세상,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단순한 신념만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의 모습을 알리고 싶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최후의 순간조차  알아낼 수 없는 수많은 죽음들이 있었고,

간신히 살아남아서도 평생을 감옥에서, 보호감호소에서 보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께 가장 먼저 이 글을 바친다. 

 

빨치산의 딸 프롤로그 中에서-

 

   그 할아버지는 1948년 국군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여수 14 연대가 백운산 줄기인 반내골을 지나 지리산으로 입산한 뒤였다. 구장이었던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 의논해서 반란군에게 밥 한 끼를 해주고 고추장이며 된장 등속을 대주었다. 할아버지는 좌익도 아니었고, 동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철수한 다음에야 기세 등등하게 반내골로 들어온 국군 토벌대는 부역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를 처형했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아랫동네 토금리에서는 그렇게 해서 한꺼번에 서른 명이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반내골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해서 대낮에도 컴컴할 정도였고 호랑이도 있었다고 했다. 고조할머니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얘기, 할아버지의 예쁘고 우아한 기생첩 얘기 ······. 가슴 아픈 기억일 법도 하련만 세월에 무더져서일까,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자신의 역사를 내게 들려주었다. 지체 높은 양반집이라 해서 열여섯에 시집왔던 할머니는 허울 좋은 양반 가문을 지키며 일에 찌들려 구십여 년을 살아온 셈이었다.

 

   "저그 저 묏동이 보이지야?"

   할머니는 해방 이후 격동의 시기에 모두 불타고 다시 자라기 시작한 소나무 숲을 사이를 가리켰다.

   "저것도 니 애비맨키 반란군혔던 사람 묏동인데, 뉘 집 자석 인지도 몰르고 원제 죽었는지도 모르제만 넘 일 같지 않아서 우리 동네 사람들이 묏동이라도 맹글어준 것이여. 설날이나 보름 때는 떡이라도 갖다 놓고 했는디 인자 세월이 지난께 다 잊어부렀구만······.

   할머니가 가리키는 소나무 숲 사이로 바람과 비에 씻겨 내리고 잡초가 무성한 작은 무덤이 보였다. 우리 아버지처럼 반란군이었던 사람, 고향도 아닌 낯선 이름도 없이 묻혀 잊혀진 사람 ······.

 

   "넘들이 다 부러워하던 철도를 그만두고 느그 애비가 왜 반란군이 됐능가는 나도 모르제만, 느그 애비가 구례·곡성 인민위원장꺼정 지냈는디, 긍께 그거이 여그 베실로 따지자면 군수라등만. 시물세 살 때였제. 하기사 그때 잘난 놈 치고 반란군 아닌 놈이 있었간디. 모지리 팔푼이들이나 우익 한 시절이었는디. 잘난 느그 애비 세상 잘못 타고나서 팽상 고상만 한  걸 생각흐먼 지금도 속이 끊는다. 늘그막에 자석이라도 봤잉께 다행 이제. 금매, 저것이 워쩌다가 쑥 튀어나와씰꼬."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늙은 눈에는 눈물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할머니와 길을 걸으면 흡사 과거의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통해 이전에 그렇게 궁금해하던 부모님의 과거로 향하는 열쇠를 찾은 셈이었다. 이를 눈치챈 부모님이 할머니에게 나 데리고 무슨 말하지 못하도록 말씀을 드리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할머니와 나의 은밀한 여행은 멈춰지지 않았다.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 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 살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였거나 어쩌면 완전히 잘못된 역사인 것만은 분명했다.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은 배웠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적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내 혼란의 일부분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왜 세상에는 차별이 있는지, 왜 나는 공산당의 딸로 태어나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지. 할머니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할머니는 책에 씌어진 역사와는 다른, 보통사람들의 역사가 있다는 것, 내 부모는 그 역사의 와중에서 그것이 옳든 그르든,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까지 내던졌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부모님은 이런 투의 말만 비쳐도 안색이 변했다. 과거에 대해서도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디 가서 입고 벙긋 말라는 당부 외엔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부모님은 목장 꾸미는 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남의 산을 빌려 초지를 만들고 융자한 돈으로 소를 살 생각이었다.

~중략~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1부 '조국이 부르다' 

 

1952년 2월 29일 도당과 선이 닿았다. 석 달 만이었다. 곡성의 상황보고를 올렸더니 잠시 후 그에게 소환장이 날아왔다.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으로 임명했으니 당장 백운산 도당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곡성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새도 없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몇 하고만 급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날 밤으로 곡성을 떠났다. 만 1년 3개월간의 곡성 생활, 곡성 사람들은 그를 눈물로 떠나보냈다. 이별이 아쉬웠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무사할지, 지금까지처럼 철저하게 지형을 이용하면서 살아남아야 할 텐데······.

이 중에는 다시 못 볼 사람도 있을 터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쳐다보려고 자꾸 뒤돌아보는 동안 어느새 사람들은 하나의 아득한 점으로 사라지고 사연 많았던 통명산도 멀어져 갔다.   

 

1권 마지막 25장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도당 사람들은 모두 여전했다. 박영발도 예나 지금이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여전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에게서 곡성 상황을 듣고 나더니 박영발은 애조 띤 얼굴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혁운 동무 같은 사람이 더 많았더라면 피해를 줄였을 텐데······. 현재까지 피해 상황이 접수된 곳은 광양과 곡성뿐이오. 광양은 일흔여섯 명이 생존해 있는데 야산뿐이 곡성에서 예순세 명을 살렸다니 대단하오. 고생했소. 앞으로 조직 부부장으로 좀 뛰어주시오. 일단 선부터 연결해야 할 것이오."

 

   도당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순탄광 출신의 박갑출이 부위원장이 되어 도당 위원장을 보필하고 있었는데, 전의 부위원장 김인철, 도 인민위원장 김백동, 지구 사령관 김병억을 비롯하여 간부의 반 이상이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노령지구당책 김채윤은 포로로 잡힌 모양이었다. 수도 공세 이후 전남의 입산자 80퍼센트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혔으니 참으로 암담한 겨울이었다.

 

   수도사단 대공세가 끝나고 나서 전남도당은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전남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조직부에는 부부장을 두 명 임명해 동서부에 한 명씩 배치했다. 동부지역은 박영발이 구례, 광양, 여수, 순천, 고흥, 곡성 등 6개 군의 지도를 맡았고, 서부지역은 유격대 총사령관이자 도당 부위원장인 김선우가 책임을 졌다.

 

   그날부터 선이 떨어진 각 군당의 선대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구례 40명, 순천 12명, 여수 3명, 고흥 13명, 승주 3명. 이것이 열흘 후에 파악된 생존자의 전부였다.

 

   3월 중순에 그는 서부 전남 지도부가 있는 백아산에 가서 정확한 피해상황과 업무를 파악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연락원과 함께 길을 나섰다. 총사와 접선이 되어 김선우를 만났다. 총사는 4백 명이 넘던 부대가 그날 보니 겨우 칠팔십 명만 남아 있었다.

 

   김선우가 옆에 앉아 있다가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김선우의 눈가로 장난기가 흘렀다.

   "이봐 혁운 동무. 자네 김춘옥 동무 좋아했었지? 보고 싶나?"

 

  "그 동무 말이야, 노령 지구에서 분산 낙오되어 수산재 올 때까지 꼭 보름을 굶었다는데 용케도 살았어. 지금은 곡성 군당에 가 있네. 보고 싶거든 지금 빨리 다녀와. 요 너머 보름재골에 있는데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그녀가 그동안의 사정을 죽 털어놓았다.

 

   노령 지구 가마골에서 수도사단 공세를 만나 수십 차례 포위를 당하여 분산을 거듭하다 마지막 공세 때는 혼자 남았는데 선을 대기 위해 온 산을 열흘 동안 헤집고 다녀도 선이 닿지 않아 모든 동지들이 전멸당한 줄 알고 이제 죽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땅에 가서 죽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아산 가는 지리를 알아야지요. 담양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멀리 백아산 방향만 보면서 무조건 걸었어요. 간신히 백아산 수산재에 와서 곡성 쪽으로 발을 디뎠는데 워낙 오래 굶었던지 기운이 쭉 빠지더라구요. 그러고는 눈을 떠보니까 총사였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그의 가슴에 상처투성이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흐느꼈다. 이게 사랑인가. 그는 자기가 있는 땅에 와서 죽겠다는 생각으로 알지도 못하는 길을 더듬어왔다는 그녀 때문에 가슴이 벅차 왔다. 그러나 이별은 길고 만남은 짧았다.

   "빨리 건강 회복하고 열심히 싸우시오!"

   "동무도 용감하게 투쟁하세요!"

 

   서부에서 김선우와 함께 있던 어느 날 그동안의 정보를 좀 캐낼까 하고 그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단독으로 황전면 선변리에 있는 그의 친척집으로 숨어들었다. 고모할머니의 남편 되는 이는 꼿꼿한 유학자로 좌익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익보다는 좌익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혁운이(본명 정운창), 자네들 어쩌려고 그러나."

   잠들어 있는 부인을 깨워 있는 대로 상을 차려다 주고 할아버니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세상인심이 예전 같지 않네. 여순사건 때만 해도 아침에 가마귀가 울면 오늘은 거멍개 새끼들(경찰)이 올랑갑다고 침을 뱉고 안 그랬능가?

 

어저께는 내가 동내 우물터 옆을 지나는디 마을 아낙네들이 물을 푸고 있다가 가마귀가 울어제낑께 반란군들이 올랑갑다고, 징해 못 살 것다고 욕들을 해쌓대. 시방, 인심들이 다 그렇네. 목심 걸고 싸우는 자네들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고 자네들도 먹고는 살아야 할 테제만 이래 가지고 어쩔랑가.

 

사람들이 등을 돌리면 다 헛일 아닝가. 사람들을 너무 믿지 말게. 사람이란 저한테 피해가 돌아오면 참는 것도 한두 번이제 다 욕하고 돌아서는 법이네. 대체 앞으로 어쩔랑가. 자네들만 생각허먼 속이 답답흐네."     

 

   이 근방 사람들은 모두 몇 번씩 보급투쟁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쌀부터 보리며 옷감이며 신발이며 안 털린 게 없을 정도였다. 인심이 돌아서지 않을 리 없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대세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피 흘리는 우리의 투쟁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어떻게 인민들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답답한 일이었다.

 

   3월 말경 그는 다시 동부전남으로 복귀했다.

 

   결론은 지금까지의 조직활동 방식으로는 식량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돌아서는 인민들의 마음을 돌이킬 방법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사업의 전환이 필요했다. 인민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당을 보존하고 인민과 함께 싸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박갑출도 전적으로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제는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보랏빛 먼 날의 꿈으로 사라 지고 있었다. 간부들 중의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당장 오리라고 믿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최후까지 싸우다 죽는 것과,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시 오고야 말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대비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길뿐이었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10년 뒤일 수도 있고 어쩌면 50년 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뿌린 싹이 해방의 그날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았고, 살아서 볼 수 없는 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좋았다. 단지 이 결정적 시기를 해방으로 성공시키지 못한 쓰라림이 남는 것뿐이었다. 이제 밀알이 되는 것, 땅에 뿌려져 더 많은 밀로 태어날 그날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남은 그들의 자리였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오후 6시경 박xx로부터 저녁에 소주한잔 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7시에 만나기로 하고는 오른쪽 어깨에 안티푸라민 로션을 1회용 장갑을 끼고 발랐다가 화끈거림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선풍기 바람도 소용없고 물티슈로 닦아 내다가 화장실로 들어가서 씻어내었습니다.

 

무전동 칭구반다찌로 갔는데 들어갈 때 보니 맞은 편에 철공단지 대동스쿠르 사장과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나중에 그쪽에서 자리를 먼저 떴는데 주점 업주가 그쪽에서 지금까지 먹은 술값을 계산해 주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2차를 간다고 빨리 일어섰다고 하는데,

요즘 같은 시국에도 2차를 즐기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일기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9.30(목)  (0) 2021.09.30
2021.09.29(수)  (0) 2021.09.29
2021.09.27(월)  (0) 2021.09.27
2021.09.26(일)  (0) 2021.09.26
2021.09.25(토)  (0) 2021.09.25